할 말 없는 세상..

노무현이 죽었다...

세상에 박정희도 아니고 전두환도 아니고 노태우도 아닌 그가 자살을 했단다.

KBS 기자가 그런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사례가 아닌가 싶다"

한국이 그런 사회다.

삶의 점성(粘性)에 관하여.

유리는 점성도가 아주 높은 액체란다.
고체인 액체라고 봐야 한다던가,
좀 더 유식하게 비결정성 고형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논쟁등이 큰 차이를 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난데 없이 고등학교 2년 수준에서 멈춰 버린 지식들을 동원해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은

투명해질 수 있는 점성이라는
천.천.히 식어가는 것이 만들어낸 투명함에 대한 감성때문이었다.

식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뜨거워지길 거부하는 것 보다,
그 모든 과정이 결과적으로 생성해 낼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게 차라리 낫다.

식어간다는 것은 다시말해 뜨거움에 대한 보전과 관리 아니겠는가?





눈물을 흘리려다 토할 뻔한 기사.

중앙일보다. http://news.nate.com/view/20090408n00664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된 빈곤 아동의 문제를 보여주려는 기사의 의도가 간만에 훌륭해 보여 클릭해 읽어보았다.
4명의 기자가 특별취재팀을 꾸려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살림살이에 위기감이 팽배한 시대에 그래도 기자들이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어 읽기를 시작했더니 역시나 착각이었다.

부산의 혜정이 이야기는 그나마 극적구성의 묘가 있어 눈물이 나려다가, (그것도 다시 보니 영 신파다)
바로 그 아래 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기사는 "빈곤 아동"을 "거지새끼" 취급하다 못해 "잠재적 정신이상자"이자 "사회불안 세력"으로 성장할 아이들로 낙인찍는데 급급한 그들만의 정형성을 보여줬다.
아! 눈가가 촉촉해지는 틈을 주지도 않고 가래가 끓어오르다 신물이 넘어왔다.
면도칼 숨켜 얼굴을 쓰다듬는 짓을 빈곤아동들에게 하는 짓들이란...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아이들의 생존권 교육권 문제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일언 반구도 없이 (원론적인 이야기는 첨부를 했지만, 그건 목사 마이크 빠는 소리고) 이젠 숫제 빈곤아동이란 낙인속에서 "사회적으로 버려진"아이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는데까지 나서고 있다. 그런 통계를 생산해 내기까지 했다. 도대체 뭐가 전공인지도 모를 교수"팀"에 중앙일보가 직접 의뢰를 해서 말이다. 사람들의 편견을 "과학적"으로 확증해 내는데 아낌없이 투자하는 그들의 돈잔치가 부러울 정도다. 

하여 이제 부잣집 아이들은 빈곤한 아이들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할 확률이 2-3배 정도 더 있게 된 셈이다. 기사로 보건데, 비교대상이 일반아동이라는 논리적으로 허당한 집단이니 부잣집 아동들은 최소한 ADHD로 부터는 자유로운 것이 분명할 테다.
한편 연구결과와 세간의 편견이 과학과 권위의 이름으로 결합한 결과, 정상적인 성인들은 빈곤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유년기에 빈곤을 경험했던 것 조차도 한 인간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근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이 기사의 핵심은 사실 그런 뻔한 중앙일보의 기사구성에 있다기 보다는 빈곤 아동 문제라는 것이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보단 이젠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앙일보 기사는 빈곤과 아동문제에 관한 새로운 "거버멘탈리티"를 우리사회가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여 이젠 빈곤문제와 아동문제를 분리해서 볼 가능성 같은 것은 없는 셈이다. "세상에는 가난한 아이들과 부자 아이들이 있을 뿐이고, 가난한 아이들은 관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빈곤아동들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와 결부시키기는 "작업"을 진행하기전에, 
왜 중앙일보에는 "분석력 결핍 논리 비약 장애"를 가진 기자들만 드글 거리는 것인가 하는 문제 부터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네명의 나름 교육 받고 "향수냄새 화장품 냄새나는" 옷을 매일 갈아 입고 다닐 기자들이 정상적인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비판적 문제의식 조차 결핍되어 글을 쓸 수 있는가하는 것은 신기한 현상 아닌가 말이다.

아동문제 전문가도 빈곤문제 전문가도 아니지만, "빈곤아동"이란 개념을 만들어 내어 여전히 지들만 뛰는 "We Start!"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을 지켜보며 토악질을 해대지 않을 수가 없다.



 

2010년 미국 대학 임금 동결

오랜만에 대학 총장한테 이메일을 받은 기념으로(사실 총동문회에서도 왔다. 아직 난 학생인데 영 불편하다 기부를 요구할 때는 특히나) 이곳에 들어왔다.

대학 총장이 이를테면 가정 통신문겸 학교구성원 통지문으로 보낸 이메일이 한두번은 아니었지만, 이번 것은 미국경제의 암울함을 활자 한자한자에 가득 담은 느낌이다.

요지는 2010년에 일년에 $ 50,000 이상 임금을 받는 학교내 모든 직원들의 임금이 동결된단다. $ 50,000 이하의 임금을 받는 직원들의 경우엔 "괜찮았어요" 등급에 준하는 평가를 받으면 $ 1,000 보너스를 준단다.
그대신 의료보험등 각종 혜택은 변동이 없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이미 익숙한 "명퇴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새로운 사람을 안 뽑으며, 기존의 인력을 재배치하고 등등의 구조개선 조치를 취할 계획이란다.

대학 이사회의 결정이라는데, 작년기준으로 기부금이 약 20%가 줄어들었고, 경제위기 상황을 감안해서 최근 몇년간 최저수준인 3.9% 등록금 인상률을 책정한 결과, 앞으로 몇년간 1억 2천 5백만 달러정도의 재정적자가 예상된단다.
무슨 AIG도 아니고 리만브라더스도 아닌데, 하여간 재정이 아주 튼실하다고 평가받았던 미국의 한 사립대학의 상황이 이러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교육환경 개선에 대한 투자는 비록 속도가 예전 보단 늦을 지라도 계속 진행할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박사과정생에게 제공되는 stipend가 이 와중에도 "소폭" 인상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귀가 솔깃해졌는데, 몇달 전만해도 "소폭"이 아니라 전면적인 stipend 시스템 개선을 추진했던 것과 비교하면 뭐 이것도 동결에 가까운 소식이다.

어쨌든 총장왈, "우리는 현재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최근 몇년과는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데,
신문에서 기사만 읽다가 대학총장한테 이런 메일을 받으니 섬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다른 세상을 열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 다른 세상의 다음을 삶-노동의 몫으로 되돌리는 일이 필요하겠지!

미국의 사립대학이 기업화 되어있다는 사실은 뼈져리게 느낀 셈이다.
오바마가 대학이란 단어를 그 어느 때 보다 여러번 상하원 연설문에서 썼다던데...

그나저나 전봇대, 농림부장관 넥타이등 묘한 패티시즘이 있으신 우리 MB씨는 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교육엔 관심이나 있긴 한 것 일까? 하긴 교육에 대한 투자고 뭐시고 애들만 닥달하면 된다는 식의 일제고사가 있구먼.



고경태 [에디토리얼] 유감..

요즘 같은 세상에 기자이름을 기억하며 글을 읽는다는게 쉽지는 않다.
자기 이름을 의도적으로 내세우면서 칼럼이나 기사를 쓰는 몇몇을 제외하면 말이다.
속보와 특종이 기자들 스스로 만족할 유일한 창구가 된 듯한 세상에서,
회사이름 말고, 사실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를 세상이지만,
나름 작가주의 기사랄까 평론이랄까 그런게 얼마쯤은 있다해도 내가 시비를 걸 것은 아니다.
뭐 사실 다른 직종이지만, 동네 헤어디자이너 선생들께서도 이미 다 하시고 있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고보니 한때 내 주변사람들이 다들 배뭣남인가 하는 기자가 자꾸 포털에 이름이 뜨는 것을 보고,
베트남으로 잘 못 보고 클릭하고 들어갔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고....
그가 뭘 썼는지 별 기억은 없어도, 이름만은 그렇게 강하게 새겨진 그런 경우도 없지 않긴 하다.

이제 시네 21 편집장이 된 고경태는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몇 안되는 "아는기자"같은 사람이다.
그가 한겨레 21 시절에 줄기차게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를 이슈화 했을 때, 독자로써 열심히 읽었던 탓에 말이다.
목숨걸고 기사써야할 때였고...
제2의 오홍근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던 때 기사를 꿋꿋이 쓰던 대나무 같은 인상을 기사 너머로 받았었고...

그런데....
[에디토리얼]이란다.
네이버에서 클릭했을 때 씨네21 사이트로 연결만 안 됐으면,
뭔 "한글로 옆차기한 영어"인가 하고 창을 닫을 뻔 했다.
(사실 더 가관은 "나의 길티 플레저"라는 꼭지명이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영어로 써라. 환장을 하겠네 그려..)

[에디토리얼] MB를 욕하지 말자.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05&article_id=54678)

그래도 그렇지 이건 무슨 외국기자가 쓴 글을 번역한 것도 아니고,
그것도 한겨레 출신기자 출신 편집자가 쓴 글에 붙을 꼭지명(코너라고 쓸라다가 쪽팔려서 다른 말 찾느라 힘들었다)과 제목일까 싶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다.

날도 추운데 썰렁한 말장난을 하자면, 에디토리얼이 무슨 에디머피가 썰을 풀어놓는 곳은 일단 아니지 않는가?
편집자가 쓴 글이니 얼마간 사설의 성격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읽다가, "에디머피"적 해학도 없는 글에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MB를 욕하는 것은 노무현 욕하는 것과 닮아있다. 욕할라면 제대로 하자. 욕에도 진지함과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자기성찰하자.

뭐 그런 식으로 정리되는 썰풀기를 읽고 나니 급격하게 대뇌가 급격히 수축하고 혈압이 오르는 데...
자려고 누웠다가 편안히 눈감기 힘들어져서 다시 일어나 이렇게 손비비며 타자를 치고 있다.

일단 모니터 쳐다보다 눈꼽 생기게 하는, 그의 엘리트주의적이고 적당히 시니컬해진 어조는 잠시 접어 두더라도,
노무현 때문이다와 MB때문이다를 같은 수준에 놓는 그의 어설픈 "비교사학"에 헛웃음이 나온다.
뭐 술자리에서 들었다면 그러려니 했겠고, 법적 신분이 보장된 "개그맨"들인 국회의원들이 중 누가했다면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에디토리얼]이시라니까 오마이뉴스의 [취중진담]도 아니고, 이건 좀 문제가 심각하다.

자신이 답이 안나오면, 그 옛날 국어책에 나오던 어떤 "작가"아저씨 처럼, "붓두껍"을 닫거나,
손꾸락에 깁스를 한 결과 한주 쉬겠다고 쓰던가 해야지,
자기가 시니컬 해졌다는 사실을 가지고 세상에 발언하려고 들면 이건 오버다.
"MB때문"이 아니라 "덕택에" 경제도 안좋은데, 지면낭비고 편집자 지위를 감안하면 정치적 과용이다.

노무현 때문이다는 한때 유행어도 되기도 했으니까 대체로 그려려니한다.
사실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캐릭터적 파탄에 기반한 바도 없지는 않고, 보수 작전조들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MB 때문이다도 그런가?
무엇보다 나는 MB때문이다가 그렇게 쉬운 언설인가에 일단 의문이 든다.
 
"쥐새끼"운운하면서 "MB가 하는일이 다 그렇지"류가 노무현때문이다가 비슷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노무현 때문이다"의 공론장에서의 등장과 "MB"에 대한 비판은 일단 그 내용과 수준이 판이하다.
심지어는 발화주체조차도 대체로 판이하다.
그리고 "MB 때문이다"가 "노무현 때문이다" 계보를 잇는 문학작품으로 등장할 일은 내 어줍잖은 상상력에는 없다.
이건 그냥 고경태가 느낀 사적 감정의 오버밖엔 아니다. "MB 욕하는게 뭔 의미가 있지?" 이런 수준에...

오히려 현실적 상황은 사람들이 사실 "MB 때문이다"라는 말을 쉽게 토해내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을까?
냉정하게 아직 "반정부투쟁" 혹은 "정권타도"가 일반적 구호는 아니지 않는가?

"노무현 때문이다"가 MB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대중정서를 기초했다고 하면,
"MB 때문이다"는 일단 논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일단 쉽지가 않은 정치적 수사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을지 몰라도, 복잡하긴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걸 하겠다고 일찍부터 덤비는 인간들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고,
자기 손가락으로는 MB안찍었다고 그 손가락으로 키보드와 사타구니를 오가며 자위나 하고 있는 인간들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런데 정작 거기에 대고 한말씀 하시고 싶었던 것인가?

그의 글이 그렇듯, 급하게 논리적으로 비약을 해보자면, 그래서 상상력도 없고, 침착하지도 못한 MB 비판자들은 닥치라고
혹은 시끄러우니까 "볼륨을 낮춰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기본적으로 "노무현 때문이다"와 "MB때문이다"는 유사한 서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다르다른 이야기란 사실을 몰라서일까비슷한데가 한군데도 없는 언설이다. 그걸 몰라서 일까? 대체?
거 지난 8-9년 전에도 그저 "양민학살은 무조건 나빠" 정도에서 글을 썼던 것일까 그는?
하긴 캄보디아를 침공했던 베트남 이야기를 어줍잖게 끼워넣었던 것도 기억이 나긴한다.
뭐 개인적으로 오죽했겠냐 싶기도 했지만, 다시생각해보니 생각이 얼마간 단순해야 그런 기사꼭지를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를 쓰다 끼워넣었겠구나도 싶다.

"나는 노무현도 싫었고 MB도 시껍하다"는 인간들 중에서,
그나마도 모니터 보며 코딱지 파던 손으로 마우스 클릭하는 인간이나 "뭐 비슷하네" 하고 생각한다면 모를까.
MB에게 책임을 묻는것과, 노무현에게 책임을 묻는게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쓴글이라면,
"에디토-리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으로 깨끗히 내 손꾸락을 접겠다..

"네덕 내탓"류의 한국 토착 천주교 캠페인도 아니고,
무슨 어쭙잖은 자책류의 논조로 마감을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엔 "촛불타령 그만하자"가 오히려 더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요즘 노래 안부른다는 정태춘도 이유가 있다고 하더만,
"춧불만 하염없이 태우리라"류의 진부한 지식인들의 논조가 나는 지겹다.

내가 "촛불"의 신선함과 거리에 넘쳐나던 상상력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하염없이 태우고"만 말 것이 우리들의 분노와 보다나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면,
"욕하지말자" 같은 계몽주의부터 벗어던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 순위: 한국 공동 47위!

최근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정부의 부패상을 폭로한 두명의 기자에 대한 재판이 열린 이후,
이 문제를 이슈화한 "국경없는 기자회"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간간히 읽어보고 있는 중인데, 
메인 페이지에, 지난 한해 (2007년 9월 1일부터 2008년 9월1일까지)의 각국의 언론 자유상황을 평가한 "순위"가 나왔다.

열고 들어가 한국을 찾아보니..

한국 공동 47위!
지난해 보다 8계단 하락했다.

언론자유 억압으로 악명높은 아시아지역을 대체로 살펴보면,
한국은 일본 (29위), 대만 (36위)에 이은 3등을 차지한 셈이다.
뭐 상대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구나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 해보인다.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언론환경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랭킹이라는 다소 의아한 방식을 채택하는 통에, 말 그대로 "나쁘진 않군" 수준의 평가를 양산해 낼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한 나라에서, 그리고 자칭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세계 40여개 국가보다도 못한 언론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언론 환경이 악화되고 최근의 추세를 보면, 한국의 47위라는 올해의 "언론자유 순위"는 그나마 이명박 정권 출범전의 "점수" 덕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든다.
사실 "순위발표"가 진행된 2002년 이래, 한국이 최악의 성적표를 가졌던 것은 2003년 49위다.
노무현 정권 취임 후 조중동 기자들이 "좌파정권 언론장악 음모"가 드러나고 있다며 설레발을 치던 2003년의 시기였고, 외부적으로 보면 이유야 어쨌든 몇몇 정책들은 "언론 길들이기"로 이해될 여지도 없지는 않았으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도 되는데...
동일한 정권 하였던 2006년에 한국이 여태까지 오른 가장 높은 순위인 31위를 했었으니,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은 오히려 언론 자유를 가져 온 것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섯부르게 내년도 순위를 예측하긴 이르겠지만, 최근 이명박정권의 행보를 보면,
2009년 한국 언론자유 순위 하락은 불 보듯 뻔한 듯 한데...
주가가 하락하고, 환율이 폭락하는 동시에 언론의 자유지수도 급강하하는 추세를 지켜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제발 좀 참으시라!!

관련사이트: http://www.rsf.org/article.php3?id_article=29031


 

80년대 후반에 멈춘 "노공이산"의 정치적 성장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또 한말씀 하셨나 보다.
호남 선량들 때문에 민주당이 안된다고. 이 반복적인 논리는 이제 그의 정치적 지론이 된 듯 싶다.
자꾸 듣다보니 이젠 좀 지겹기도 하다가도 원래 장광설을 즐겨하는 그의 정치적 언사중에 유독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또 이것이 아닌가 싶어 곱씹어 보게 된다.

민주당은 사실 요즘 그다지 관심도 못 받는 정당이 되었는니, 최소한 노공이산이란 아이디를 쓰는 노무현의 최대 기여는 역시나 어김없이 민주당을 다시 한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권역 안으로 끌어들여 놓은 것이다. 이점에서는 민주당 호남 선량들로 지목된 이들도 기꺼이 감사할 것이라 믿는다. 또 "호남운운"하는 언사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호남사람들을 대체로 불편하게 만들것이니 그 점에서 호남인들의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낳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것이 "양화로 악화만 재구성하는" 묘한 정치력을 가진 노무현의 일관된 모습이다.
호그와트 마법학교 정치학과 출신들이나 겨우 이 기묘한 노무현의 정치적 마술을 풀어내지 않을까도 싶은데...

내가 지금까지 노무현의 정치행태를 지켜봐온 결과 분명하게 말할 수있는 것은 노무현의 정치적 성장이 20년전에 멈춘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그나마 정치적 변주의 가능성을 만들어준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딜레마, 그러니까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시장주의자라는 아이러니일 뿐이고 말이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의 발언, "호남선량..망치고 있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야당 주류에 대한 비판으로써 그것은 얼마간 정당하다.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영남 선량......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거의 대등한 수준이다.
 
(요까지 쓰다 말았네.. 왜 그랬을까? 2009년 4월 확인)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에 관한 단상

하노이에서 CCTV5 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행사와 입장식을 봤다.
텔레비젼이 후져선지 실제로 장이머우의 과도한 색채 조명 예술 구현 때문인지, 식전행사를 보는 중에 눈이 피로할 때로 피로해졌다. 이젠 시신경마저 LCD, PDP 가 아닌 브라운관 텔레비젼을 거부하는 하는것일까?
북한의 아리랑과 경쟁하듯 진행되던 식전 행사가 끝나고,
각국 선수단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자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올림픽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구상엔 참 나라들이 많다.
대륙별로나 권역별 혹은 인종, 종교, 언어, 권역, 체제별로 동시 입장하면 안될까하는 말도안되는 생각도 좀 들었다.

어쨌든 그나마 올림픽 입장식 생중계 때서야 몇몇 나라가 지구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니 무지를 깨우치는 셈 치고 눈을 부릎 뜨고 보기는 했는데....

입장식을 다 보고 나니 뭔가 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의 "파워"를 느꼈다던가 하는 것 과는 다른..
 
무엇보다 입장식 초반부에 들어온 일본 선수단의 모습이 시선을 붙잡았다.
특별히 예쁜 선수가 있거나 서구 선수들 처럼 "튀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 손에 나란히 쥐어진 일장기와 오성홍기 때문이었다.

어라.. 일본은 올림픽 개막식에서 "금메달 수확"을 결의하는 전의를 불태우기 보단, 정치를 하는구나....
만주국 지배와 난징 대학살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10억의 시선이 텔레비젼으로 모아져있는 그 순간에 그들은 일장기와 오성홍기를 함께 흔들며 친근한 이미지를 심고자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를 보니 심지어 일본 선수단의 기수는 중국에서 탁구선수로 활동하는 여자선수란다.
(http://beijing2008.media.daum.net/news/breakingnews/view.html?cateid=1004&newsid=20080808133313323)
역시 놀라운 일본이다. 정치는 그러니까 부시하고 어깨동무하고 카트끌고 모시고 다녀서 되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동원하고 예수쟁이들 시청앞에서 통성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계심을 넘어 가슴속에 파고드는 어떤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 아니겠는가? 

한편 한국 선수단은 입장 순서도 사람들이 지칠대로 지쳐있는 순서에 있었는데, 그나마 이명박 정권 등장이후 남북한 단일 입장의 이벤트도 무산되는 바람에, 말그대로 "그저 순서대로 입장한 한 나라 선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그간의 여러 사태들(성화봉송 사태와 SBS 최근 사태등) 의 영향 때문인지,
CCTV 5 는 한국 기수를 한번 보여주고 경기장 구석지에 일어서 있는 이명박과 김윤옥의 "빈티나는" 모습을 보여준 후에 느닷없이 카메라를 돌려 다른 선수단들의 다리를 보여줬다. 아.. 이렇게 무시당하는 구나....

그나마 CCTV5 영상에서는 북한 선수단이 입장할때는 조그만 환호성도 들렸었는데..그것도 이내 관중석 한켠에 등기대고 더위에 쩔은 복덕방 할아버지 자세로 퍼져 앉아 있는 김영남 때문에 오히려 이미지만 구긴 셈이었다.
아니 그 양반은 또 왜 그때 또 그리 거만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더란 말인가?

CCTV5 만 본 나로서는 내가 한국인이었기 망정이지 개막식 행사 내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북한은 그나마 "사고뭉치"로써의 관심이라도 받는 셈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색동치마와 부채춤 정도가 그나마 "Dynamic Korea" 광고영상하고 겹쳐져 외국인들에게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스포츠와 정치가 맺는 밀접한 관계는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된지 오래다.
하물며 올림픽은 그 자체가 지구적 정치의 축소판이다. 이미 쿠베르탱 남작이 구상할 때부터 말이다.

일본처럼 오성홍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보수정치도 제 할일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병역 면제시켜주고 연금 퍼주는게 능사가 아니다.

2000년 이래 지속되어온 남북공동 입장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무산된 것은 두고두고 한국 (스포츠) 정치사에 기록될 "사건"이 될 공산이 크다.
조선족과 탈북자를 포함한 북한인 그리고 남한사람들이 뒤엉켜 생활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세계의 시선이 아시아로 모아지는 그 순간에, 또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공포가 커져가고 있는 국제적 정치지형에서 펼쳐진 기회를 그리 쉽게 버릴 것이었을까?
남과북이 아시아에서 상호 협력하고 있는 혹은 할 수 있는 단일주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넷티즌 일부가 한국 문화의 중국 복속을 염려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베이징 올림픽의 모토가 "One world, One Dream" 인데,
한반도는 여전히 Two Koreas 로 남아있음만을 전세계인들에게 각인 시킨 올림픽 개막식이 아니었나 싶다.

후진타오가 대만 선수단 입장 때 박수치듯, 하다 못해 김영남도 좀 박수도 치고, 나서기 좋아하는 명박 부부도 좀 하지말이지.. 뭐 그럴 수 있는 남과 북이었으면 이 상태까지 왔겠냐마는..

** 추가.
어째 김영남이 입장식에 관심이 없더라 했더니, 북한에서 중계를 안했단다.
뭐 사실 이유야 다르지만, 미국의 NBC도 녹화중계하니까 북한도 나중에 할지도 모르지만서도... 
"봉남통미"가 올림픽 중계에는 적어도 잘되고 있달까...쩝.
http://news.naver.com/sports/new/beijing/read.nhn?ctg=news&oid=001&aid=0002213674

깃발에서 촛불로...

차들과 매연이 지배하던 거리에 사람들과 생성의 거친 맥박들이 다시 들어차고 있다.

87년 6월 10일 전국이 국본의 "깃발"아래 모여들었다면,
이제 모두 자기 두손을 모아 촛불을 들고 있다.

그 촛불은 도로 중앙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기도 하고,
미니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도 옮겨 붙기도 하고,
말 그대로 이미 하나의 불씨이자 들불인
그런 촛불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경험치"와 창의적 다중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반면,
보수정권은 케케묵은 폭력성과 안하무인 막무가내 전술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확실히 낡았고, 새로운 거리 민주주의 빛은 그 낡고 침침함을 아우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거리위에 밤하늘 아래 펼쳐지고 있는
2008년 6월의 한국은
구제불능 이명박정권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다중적 민주주의의 실험 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냉소와 독설이 위험한 이유

나도 그렇지만 냉소와 독설은 대개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가지게 되는 버릇같은 것이기도 하다.
글과 말로 먹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자신의 "흥분"과 "화"를 고스라니 문자 위에 거친 맥박으로 옮겨 놓는 것에 대해 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가끔 "흥분과 냉소의 언어"가 글쓴이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전혀 다른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프레시안에 기고했다는 "....웃기고 자빠졌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428094447) 는 그런면에서 위험한 글이다. 중국이란 정치체와 10억인들의 관계를 거의 자연화 시켜버린데다가, 단순한 "반중국" 논자들이 제멋대로 생각해버릴 가능성을 냉소와 흥분의 행간에 너무 많이 열어놔 버렸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중국의 "애국주의적 광기"를 탓하다가, "반중국"이란 "집단적 혐오증"을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가 버린 것이다. 이건 좀 아니지 싶다. 그가 그리 "불구대천의 원수"보듯 하는 주사파도 사실 좀 넓게 보면, "반미주의"라는 "집단적"이고 "단순한" 혐오증에 기댄바가 크다. 그러니까 "안티"테제는 그 자체로 논리적인 함정이 너무나 많고 얼마간 "폭력의 귀환"으로 밖에는 수렴되지 못 할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중국 젊은이들의 "광기어린 애국주의"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 만큼도 없지만, 티벳 사태와 올림픽 성화봉송과 관련된 전지구적인 분란이 시사하는 바는 중국인들이 "소양"이 안됐다는지 하는 식의 즉자적인 역공격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반목하고, 자결권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주의가 다층적으로 작동하는, 다시말해 티벳의 자결권과 중화민족(한족)의 자결권이 뒤엉켜 버리는 현재적 상황을 분석하는게 아닐까 싶다.

나이브한 제안 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충돌이 충분히 예상 되었던 사건인데, 그럼 적어도 미리 한번쯤 모든 이야기를 들어 볼 토론회 정도를 기획하는 것이 이른바 진보진영의 성숙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국내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중국 젊은이들도 그들이 "광적 중화주의자"던 무엇이던 이미 우리사회의 일부였던 셈이고, 티벳인들도 마찬가지고, 티벳 여행하고 돌아와서 작정하고 친티벳 지지자가 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고, 그 모든 문제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인들도 함께 불러내서 말이다. 적어도 그러는 과정이 있었다면 느닷없이 서경석이나 플러첸 같은 인간들에게 논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찰은 뭐했나?" 식의 논의가 한국사회에서 티벳과 성화봉송 문제와 관련된 사후적인 논의의 주된 이슈가 되어야 하겠나?

도대체 그 많은 한국내 중국 전문가 학자들은 뭣 들 하시는 것일까? 자기 밥줄 끊길까봐 근신하시는 것도 아니고.. 진중권이 오죽했으면 자기가 뭔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흥분해서 글을 쓰겠냔 말이다.


코믹한 "이벤트"만 하는 이명박 방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나오는데 이젠 정치기사 읽기를 좀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정서적으로 이병박 정부 등장 이후 너무 황폐해 지는 것도 같고.

골프카트를 몰고 역시 미국인들의 영원한 아시아 "캐디"는 한국인이란 것을 각인시킨 사건에 대해 한국 언론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데, 아래 기사는 그 소스부터 걸작이다.

특히 폭스의 브라이언 콜 기자는 “동시통역이 진행됐음에도 이 대통령이 즉석에서 영어로 농담을 하는 등 자연스럽게 회견을 진행한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전하면서 “특히 다른 정상회담 때와는 달리 어제 방문국 수반이 카트 운전을 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이 대통령의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이벤트였다”고 평가했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4&oid=014&aid=0001966549

폭스 뉴스는 미국 애들도 그것이 "뉴스"냐고 하는 뉴스이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제정신으로 보기 힘든 뉴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 기자 말을 열심히 받아쓰기 까지 해서 이병박의 "신선한 코메디"를 전하고 있다. 그나마도 행간을 읽으면 말그대로 "어이없는 인간"이란 소리를 미국식 "나이스체"로 표현한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느닷없이 남북연락사무소 설치를 말하질 않나, 몬타나산 소고기 광고 도우미를 자처하지 않나 하여간 썰렁한 코믹 레퍼토리로 가지가지 하시는데, 정말 못 봐주겠다는 생각밖에는...

빨리 또 일본 "공연" 가셔야지...

정치인 유학의 계절이 오는가...

총선이 끝난 다음날이었던가? 한국 유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거물급" 정치인들이 이제 대거 미국으로 몰려오겠다고 혹시 "방문학자"비자가 남아나지 않아, "등록비 더블"을 부르고 미국 대학들과 딜을 하지 않겠냐고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재오가 테이프를 끊을 모양이다.
유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가장 각광받는 미국내 정치인 "유학촌"은 워싱턴DC일거라고 했더니 이재오도 그 곳을 강력 검토 중이란다.

워싱턴 DC는 미국 정가의 로비스트들의 집합소이니 어차피 "재기"를 노리며 "간"보는 한국정치인에게는 자신의 "국제 정치 (로비) 감각"을 키우는데는 매력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 정재계 그리고 관계인사들도 정기적으로 "예방"하는 곳이니 국내 정치와 그다지 떨어져 있어 소외된다는 느낌도 없을 테고 말이다.

이명박도 선거비리로 의원직을 내놓고 워싱턴에 있었고, 홍준표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보면,
이회창이 대선 패배 후 머물렀던 스탠포드 보다는 (물론 정몽준은 조금 예외적일 수도 있겠다-그도 스탠포드에 와 있었다)  워싱턴 체류자들이 현실 정치무대에서 잘나가고 있으니 나름 재기를 위한 "명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차피 무슨 학위를 얻기위해 공부를 할 사람들도 아니고, 이력서에 "연구원" 한줄 더 집어 넣고, 국제적 정치 경험을 했다는 확인되지 않을 경력을 덧칠하고 싶어할 해외 원정생활이니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는가?

정치인들의 미국 유학이 남긴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데,
월스트리트의 뉴욕도 아닌 워싱턴 DC에 머물렀던 이명박은 어디 한인 테니스모임에서 귀동냥을 했는지 정치대신 "아비트리지"를 배워왔다고 돌아와서 자기와 같은 "급"이라고 생각했던 재미교포 "천재"에게 사기당하고,  "두잉 베스트" 하시고 계시는 중이다.

사실 자신의 전공 보다는 유학생활 동안 "오렌지"와 "어륀지"의 차이만 "감명깊게" 배워 온 이경숙같은 "총장"도 있으니까 누굴 탓할까마는, 정치인 유학이란 새로운 장르는 한국의 독특한 정치문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같다.

기본적인 정치인으로써의 ABC만 생각을 해도, 정치적으로 재기를 할려면, 현장에서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싶은데, 너도나도 미국 유학을 입에 올리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무슨 개뿔 한반도 문제, 북한 문제를 미국와서 연구들 하시겠다는 말들 일까?
받아쓰기 출제자 직강이 고프신 것도 아니고...

중국이나 러시아라면 내가 또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해리티지 재단 같은 연구소들은 네오콘의 이론적 지지를 위한 미국내 대한국 "꼴보수 싱크탱크"들인데 그런것은 "조갑제 닷컴"이나 "시대정신"같이 한국에도 다 있다.
그런데서 "통역 통해" 줏어들은 몇마디를 가지고 들어와서 한국 정치를 또 얼마나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그러는 지...  도서관에서 책한권 제 손으로 찾아보지 않을 인간들이 말이다.

워싱턴 DC가 좋긴 하겠지. 특파원들하고 한번씩 술마심서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는 인터뷰도 종종 해가면서 외롭지 않게 지내긴 말이다.
뭐 미국 입장에서도 고마울 따름일 텐데, 돈보따리 싸들고 기부하겠다지, 한국에 "**대학에 연구원으로 있는" 하는 식으로 홍보도 해주지, 직접 찾아가서 한국정치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대외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보다는 제발로 걸어온 몇몇 한가로운 정치인들을 통해 "정보"도 쉽게 빼먹을 수 있지....하여간 말이 유학이지 제발로 "서자"로 살겠다고 기어들어오는자 누가 말리겠는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워싱턴에서 여야불문 "낙선자 친목회"가 열릴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자기돈으로 가겠다는데야 뭐 말릴 장사가 없겠지만, 제발 미국에서 한국을 대변함네 하면서 뻘짓이나 안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들이 "낙선"이후에 뭣들하고 사는지라도 좀 배웠으면 좋겠다. 그래도 고어는 낙선이후에 환경운동가로 나서지 않았던가?

세상은 항상 그렇지만, 배운 놈 보다 "배운 척 하는 놈"들이 피곤스럽게 만드는데...

"내가 미국에서 보니까 말이지" 하는 식의 허풍만 들어 돌아오는 정치인들이 또 4년 뒤 한국사회를 흔들려들거라 생각하니 암울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한국문제도 제대로 볼 능력이 없었던 인간들이 말이다.

선거와 20대

인터넷 상에서 저조한 투표율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란다.
 
주로 20대의 낮은 투표율을 지적하는 3-40대의 분노가 폭발한 것인가 본데,
재외국민 투표권이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기권자"들 중의 하나인 내 입장에서 뭐 할말이 있겠나 싶지만,
어떻든 세대간의 싸움으로 한나라당의 압승과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설명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젊은 세대들의 투표 참여는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문제적"인 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젊은 세대는 진보정치세력의 득표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들 예측 하는데,
그래서 진보는 투표연령을 18살 까지 낮추려고 노력하고 보수는 대개 젊은이들의 투표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사회에서 보자면 그러한 논리가 얼마나 유용한 논리인지 잘 모르겠다.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보면, 20대에서 한나라당의 정당지지율이 50%를 넘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들의 부모인 50대의 정치적 성향과 거의 일치하는 이들의 "정치 선호도"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독자적인 세대로써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보인다.
20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분명한 듯 해 보이나, 그들이 독자적인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로 등장하기엔 아직 미흡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투표를 하던 안하던 적어도 현재는 20대의 역할이 큰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아보인다. 

20대의 삶은 신자유주의적인 일상으로 재편된지 오래다.
대학입학하자 마자 취업, 유학 준비로 영어학원을 전전하는 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그들의 삶에 유일한 "보루"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된지도 오래다.
등록금 인상 물가 인상은 그들이 아르바이트로 감당하기 힘든 것이 되었고,
DMV 폰, PSP, 디카, 노트북 등 20대의 "품위유지"를 위한 소비 품목들은 더욱더 늘어났다.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청년학생을 보라"는 식의 20대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역군임을 강조하는 내러티브도 약화된지 오래다.
교수들은 그들을 "학력저하"의 산 증인으로 몰고, 문화산업 마저도 30-40대의 "구매력"에 호소하는게 더 안정적인 마케팅 전략이다. 20대는 여러 취업학원, 유학원들의 주요 소비자일 뿐 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가 상당기간 약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진보정치세력은 88만원 세대에 대한 대변자를 자처함에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사이 20대들에게는 일단 살고는 봐야할 것 아니냐는 패배주의나,
그나마 부모들의 부동산 가격이나 올라주길 바라는 수준에서 자신의 정치의식을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20대들에게 386이나 90년대 초반학번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집단적인 정치적 경험과 "진보의식"의 집단적 세례를 기대하기란 힘들어보인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새롭게 "정치성"을 부여해야하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20대는 87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놓은 정치지형을 극복해 내야만 한다는 어떤 정치적 과제로써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지난 선거에서 진보정치세력은 새로운 "스타" 정치인 하나를 정치무대에 올리는데 실패했다. 사실 심상정 노회찬이 20대에게 까지 호소력을 갖는 인물이었나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홍정욱 같은 후보에게 막판에 밀려버린 노회찬은 그가 패배했기 때문에 더더욱 큰 시사점을 안겨주는 것 같다. 적어도 노회찬이 "반드시"  자신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떤식으로든 2.9%의 정당지지율을 획득한 진보신당은 진보정치 "스타"로 일어서보려고 했으나, 아직 그들만의 스타에서 벗어나기엔 어려움이 있음을 확인하고, 평등파는 결국 그들이 저주해 마지 않던 주사파보다  무능력한 세력임을 보여준 것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좀 돌려보면, 얼마전 뉴욕타임즈에 필라델피아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20대 자녀들이 부모들을 설득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개 오바바 지지자들인 이 20대들은 심지어 공화당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부모들에게 민주당으로 당적을 변경해 오바바에 투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으며 실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정치적 요구에 부흥하고 있다고 한다.  그 기사에서는 이들 20대 젊은유권자들의 새로운 모습이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가치에대해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을 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스스로의 "정치적 미래"를 투사할 상징적 정치인, 혹은 "스타"를 갖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해 보인다. 적어도 정치적 이념으로써 대중적 열광을 만들어낼 무엇인가가 불가피하게 필요함은 굳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대운하를 반대한다거나, 이명박 정부의 독주를 막겠다거나 하는 정치적 수사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반대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그 생산적 힘에 의해서, 노무현 정권 이후에 심각한 정치적 좌절감과 실망감에 빠진 대중을 다시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기 위해선 새로운 "꿈"들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만이 20대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주인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요즘 애들은 개념없어"는 적어도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터져나와야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겠는가? 요즘 3-40대는 고리타분해라는 대답만 돌려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김문수의 대한민국

내가 신문이나 뉴스에서 그 이름을 볼 때마다 "혈압으로 쓰러질 듯 한" 정치인이 하나 있는데,
그게 현재 경기도지사를 하고 있는 김문수다. 이재오도 사실 그 반열의 정치인 중의 하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하다고, 이제 그들이 민자당, 한나라당의 완장을 두르고 정치를 해온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으니 그러려니 하고 봐 줄 때도 된 것도 같은데, 인간들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은 발언들을 주기적으로 토해내기에 "그 죄를 사해줄 수"가 없다.

기사를 보니, 명지대에서 열린 "성공학" 특강에서 김문수가 대한민국은 "부자들을 내쫒는 나라"라고 했단다. 그의 논리를 따르면, "성공=부자"라는 자본주의적 등식에 기초해 보았을 때 대한민국은 "성공한 자"들이 살기엔 매우 불편한 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대한민국이 언제 부자들이 "불편해 할"만큼 바람직한 나라가 되었나? 대한민국에서 부를 챙겨 "도망가는" 부자들은 많이 봐왔지만, 대한민국은 그와 비슷한 경제규모의 나라를과 비교했을 때 더 없는 부자들의 천국 아니던가? 도대체 어느나라에서 대한민국 부자들 처럼 한 줌 1%의 인간들이 권력을 주무르고,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기껏해야 불기속 기소 밖에는 안당하는 사회가 있는가?  법이던  무엇이던  돈있는 사람 맘대로 부를 세습하고, 사용하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니던가? 이건희가 소환당한 것이 그의 눈에는 부자들을 "갈구는" 대한민국이란 인상을 줬는지도 모르지만, 이건희 처럼 부를 세습할 엄두도 못내는 것이 다른 나라들이란 사실이 안보이는 모양이다.

김문수 관련기사보기

그가 "보수꼴통"들에게 "개과천선"의 이미지를 심고자 하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고, 그래서 "완장 차고" 한국 정치판에서 칼춤추고 돌아다니는 것은 익히 알아온 바지만, 대한민국은 "부자들을 쫒아 내는 나라"가 아니라, 아직도 "노동자 농민 서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이다. 단순한 비교만 해봐도, 돈보따리 싸들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 부자들과 오갈곳 없어 "죽음"을 선택해야하는 사람들의 삶 중 무엇이 더 심각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대학생들에게 그가 특강을 할만한 "성공한 정치인"인지도 의심스럽다. 그의 성공이란게 "노동자 민중"에 대한 배신, 배반의 결과이니 사실 그의 삶으로 부터 배울 것이라곤 그러니까 한국적인 부자 되기, 자신의 성공은 "자기 잘나서 된 것"이라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수틀리면 혼자 살겠다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그런 모델밖에 없지 않은가?

정말 "혈압 올리는"데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정치인이다. 김문수.

섬뜩한 언어지만, 그에게는 그가 사형제를 옹호하면서 했다는 말 한 "토막" 밖에는 그에게 되돌려 줄 수가 없다.
유아 토막살해범에 대해 마치 자기가 가장 진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마냥 혀를 놀리는데, 그 스스로가 삶의 "성공"이라는 스토리를 자본주의적으로 "토막"내고, "토막난" 서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경기도 지사라는 그의 정치력으로 "암매장"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토막 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인간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해 종교, 인권의 이름으로 두둔하고 보호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라며 "여론도 의식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어떤 욕을 먹더라도 제 양심과 기본적 판단, 이성으로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언론의 이야기를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전부 자신과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으로 본다"면서 "인간으로 말 할 수 없는 짐승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출처: http://www.kgmaeil.net/news/articleView.html?idxno=121306

그런데 이 인간 그나마도 바보 아닌가?

김 지사는 4일 오전 도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월례조회에서 "짐승들도 아이들을 토막을 내서 죽이고 하지 않는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게 무슨 말이라고 한 것 일까? 짐승같은 인생하고는!



AIDS 백신이냐 치료제냐 그것이 문제?

비내리는 새벽길을 걸어 맥도날드 아침메뉴를 새벽 1시에 먹고 돌아왔다.
텅빈 도서관에 유난히도 귀를 거스르는 한국 학부 유학생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또 이래저래 정신 못차린 "클릭질"을 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있다.
정확히는 기사가 아니라 뉴욕타임즈의 독자투고란에 실린 글이었는데, AIDS 백신개발에 임박했다는 과거의 보도도 생각나고 빌 게이츠도 나서 연구지원을 독려하겠다는 것도 생각나는데다가, 이래저래 정치기사들에 짜증도 난 터라 클릭하고 들어가 봤더니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제목이 "Grim Outlook for an AIDS Vaccine" 이란 그 독자투고글(http://www.nytimes.com/2008/03/30/opinion/30sun3.html)은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AIDS 백신 개발 포기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1984년 미국에서 AIDS를 발병시키는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미국국립보건원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백신개발 연구가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가장 유력한 백신 개발 후보였던 두개의 백신에 대한 작년 임상 실험 결과, 어처구니 없게도 백신을 맞은 사람이 더 AIDS에 감염될 위험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단다.
지난 2월 미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David Baltimore 는 AIDS 바이러스가 진화한 결과 사실상 백신을 통한 면역성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을 역설했다는데 그것도 본격적인 "백신개발 포기" 여론 형성에 불을 지르게 되었나 보다. 노벨상 수상자가 힘들겠다고 고백했다는데, 우리 "황우석박사"께서는 "YES I CAN"만을 외쳤으니, 적어도 정신자세면에서만 보자면 "안되면 되게하라" 코리안이 우세해 보이기도 한다.

AIDS "백신"이냐 "치료제"냐 하는 논쟁에 결부되어 있는 문제는, 단순한 "연구 개발비" 배정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임상실험을 통한 백신개발로 "질병을 퇴치"하겠다는데 방점을 찍는 과학주의와 고통받는 환자들을 살리고 봐야한다는 현실론도 충돌하고 있고, AIDS를  전염병으로 보는 관점과 윤리적인 질병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어지럽게 섞여있다. 문제는 최근의 임상실험실패가 "백신개발 포기"의 주요한 "과학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대학입학 논술시험이나, 구술문답고사에 내보면 딱일 주제인 것 같은데,

이미 AIDS 치료제 개발은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와 있고, 완치는 아니라도 "생명연장"의 꿈은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몇몇 제약회사의 폭리에 휘둘리고, "해독제"를 가진 자의 전제적인 "바이오 팔러틱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어, 이른바 미국에서 부르는 "바이오 캐피털리즘"의 시대를 여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제약회사의 입장에서는 분명, 일정기간 특허권을 보장 받고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치료제 개발이 백신개발보다는 훨씬 더 "효율성"있는 투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치료제는 개발 단계에서 부터 바로 투자자본을 회수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백신개발이 만들어낼 경제적 효과도 적지는 않을 것 같다. "백신접종"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각국의 의료행정이 각국가에서 그 목록을 확대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젠 겨울이 되면 다들 "독감예방주사"를 맞는 세상 아니던가?

여전히 복잡한 문제인데, 독자투고의 글은 짧은 데다가 백신개발 포기론이 "패배주의적"이라는 "전투적 과학주의"에 호소하고 있어 나와 같은 비전문가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AIDS 치료제 개발에 대한 세금 지원에 반대하는 보수적 기독교 단체가 있는 미국만 생각하고 있다가,
백신이냐 치료제냐의 문제를 접하고 나니  도통 생각이 잘 정리가 안된다.

확실한 것은 만약 미국의 국립보건원이 예산 삭감이나 개발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면,
All or Nothing이 되기 쉬운 바이오 벤쳐 마켓은 엄청난 충격파가 일게 될 것이란 것이고,

어쩌면 그래서 누군가 초기 여론차단을 위해 "알바형" 독자투고를 했는지도 의심도 가고....

그나저나 대체 AIDS 때문에 인종말살까지 위협당하고 있는 아프리카는 어찌할 것이고,
AIDS가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지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아직도 적절한 검사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숨어사는" 보균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한총련의 몰락 ? 자주의 몰락?

한총련이 16년만에 의장 후보를 못 내는 바람에 그들만의 자랑 "의장 옹립식"이 무산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29일 한총련에 따르면 2008년 제16기 한총련 의장 선출을 위한 후보 등록기간인지난 15일까지 한총련 의장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힌 대의원이 아무도 없어 올해 한총련 의장 선거가 무산됐다.

이는 지난 1993년 4월 한총련이 출범한 이래 16년 만에 처음이다.

한총련 관계자는 "올해 신임의장 후보로 나설 예정이었던 한 대학교 총학생회장이 가족의 만류로 출마를 포기하면서 후보등록기간에 아무도 후보로 등록하지 못했다"며 "한총련 출범 이후 처음으로 의장선거가 무산됐다"고 밝혔다.

(http://nuri.donga.com/nurinews/view.php?k_id=200803290250&m=2)

동아누린가하는 어처구니없는 웹사이트의 "속시원 뉴스" 코너에 올라온 이 뉴스는 뭔가 좀 어이가 없는데, 그 이유는 내가 갑자기 NL과 한총련을 "가재는 게편"인 듯 지지해서가 아니라, 기사 내용중 "가족의 만류로 출마를 포기하면서..."라는 변명때문이다.

정치적 노선은 논외로 하고, 아니 대학생이 그것도 적어도 한총련 의장 후보로 거론될 학생이라면, 한 학교의 총학생회장일테고, 그럼 3-4학년쯤은 (요즘은 5학년 6학년은 쉽지 않을 테니) 되었을 텐데, 도대체 NL이 그렇게 떠 받들던 "자주"는 개인의 삶에는 없단 말인가? 총학생회장은 나중에 취업이나 정계진출을 위해서 해 볼만 하지만, 한총련 의장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0이면 100 구속이고, 예전 처럼 "의장 구출 투쟁"같은 것이 있을리도 만무하니 별 소득 없단 이야기를 에둘러 하는 것이라 생각도 들지만..

어이가 없다. 결국 "가족들의 만류"로 한총련은 망해가는가 본데,
언젠가 조갑제가 "아이들의 돈줄을 틀어쥐라"고 보수적 부모들에게 선동을 했던 것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역시 유효한 전략인가 보다.

"노선"이 달라서, "이념적으로 동의를 못해서" 혹은 정말 솔직하게 이명박 정권하에서 "구속의 공포 때문에"라고 말하는게 내가 보기엔 솔직해 보이고 그렇담 이해를 하겠는데, "가족의 만류"는 한국의 답답한 대학생 삶의 전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국 만큼 자기 삶에 "자주적"이지 못 한 대학생들을 찾아 보는 것도 참으로 힘든 일이다.

부모가 대신 살아주는 인생들이 왜 그리도 많은가?
뭐, 정몽준이가 정치하고, 이재용이가 회장수업하는 세상이고,
술집에가서 다큰 아들 대신 몽둥이 질 하는 김승연이란 그룹 회장도 있는 사회니까...

"세계 여성의 날"에 "화병"난 조선일보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 아직 적어도 이념적인 지향을 내걸고 있다면 - 이날 남자들은 꽃과 선물을 여성들을 준비해 건네기도 하고, 사회주의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유럽이나 남미등지에서는 이날 남성들이 여성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를 기획하기도 한다. 또 몇몇 국가에서는 국경일이기도 하다.

원래는 여성의 인권과 정치적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꼭 그런 정치적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축제의 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전세계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게다가 올해는 토요일이니 어머니를 대신해 설겆이라도 하는 것이 "엄마 밥~" 하고 살아 온 한국 남자들이 한번쯤 생색을 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다. 하루라도 양성평등을 체험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지 않은가?


산업 혁명시민 혁명으로 인해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기존 사회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이제 집안에서 가사 노동만을 담당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고,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이 1857년 미국의 뉴욕 시에서 처음으로 폭발한다. 이때 방직,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곧 경찰에게 공격받고 해산되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이 최초로 그들의 노동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1908년 2월 28일 미국에서 여성들의 또 한번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15,000명이나 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 등을 요구하며 뉴욕 시로 행진하였다.

이후 1910년 제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영어)Clara Zetkin) 으로부터 매년 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여성의 날' 행사가 제안되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1911년 3월 19일에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이 치뤄지기로 결정된다. 1848년 3월 19일은 프러시아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 계급의 봉기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고 여성 참정권 등을 약속한 날(이 약속은 봉기의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취소되었다.)이었기에 이 날로 결정된 것이다.

(한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여성의 날 기원. 내용이 나름 충실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8%EA%B3%84_%EC%97%AC%EC%84%B1%EC%9D%98_%EB%82%A0 )


그런데......우리의 "대한민국 일등신문" 조선일보는 여성의 날 이브에 엄청난 기사를 내 보냈다.

제목마저 "선데이 서울" "일요신문"이 무릎 꿇을만 하게 선정적이다.


"'마술 걸린' 여학생 배려에 남학생은 화병난다" (기사 보기)


대학에서 생리결석을 용인해주는 "기이한 제도"가 한국에 있다고 소개를 하면서,

한학기 동안 여학생들은 결석 5번에 A도 받을 수 있는데, 남학생은 결석 5번에 F를 못 면한다는 불평이 커져가고 있다고, 서강대 정모군의 입을 빌어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서강대는 5번이 아니라 3번으로 결강 가능일수를 줄였다고. 기사에도 있지만, 아니 생리라는게 학교에서 두번 덜하라고 하면 안해지는 것인가?

일단 A을 "받을 수도"와 F를 "못 면한다"를 비교하는 인간들의 논리학으로 대학은 어찌 다니고, 기자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5번이나 수업을 빠지고도 A를 받는 여학생들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수업도 안들어와서 F를 못 면하는 남학생들은 도대체 학교를 뭐하러 다니는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도대체 조선일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사실 비싼 등록금 내놓고 학교에 못 갈 정도로 아픈 여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다른 방법을 학교에서 마련해야한다는 내용이라면 내가 이해를 좀 하겠는데,

수업에 결석하는 것을 무슨 "특권"으로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선이야말로 회사에 결근 하고 싶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욕망의 대리 만족은 혹 아닌가 되묻고 싶다.

물론 말도 안되는 기사들을 써내는 고충은 이해하지만, 그런데만 쓰라고 머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8,90년대 대학가를 통제하고 싶어했던 정권과 교육부가 대학교 출석 체크를 통해 운동권 학생들을 걸러내고자 했던 역사가, 저급한 대학교육의 질과 취업전장터화 되는 대학 문화와 맞물려, 대학교육을 "출석체크"로 학점주는 수준으로 떨어뜨린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왜 "출석 안부르냐"고 학장, 총장에게 투서하는 대학생들도 있다니 할말 다한 우리내 대학 풍경인데, 그러면 대학이 학위를 주지 말고 수료증을 주어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치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일정한 수준의 수업 참가 도장을 받아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기자 이름을 보니까, 최수현인가 하는 기자(여성기잔가? 그동안 기사를 보니 주로 조선일보에 연대동문회기사를 올리시던데)가 이 기사를 함께 쓴 것 같은데, 자기는 생리통이 없으니 남들도 견딜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생리휴가나 휴강제도는 조한혜정 교수도 기사에서 언급했지만, 말그대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제도가 아니던가?

그것이 단지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건강한 젊은 여성이면 한달에 한번씩은 피할 수 없이 "참아 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리적 보편성에 입각해서 마련한 제도이고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조선일보를 "여성의 날" 이브에 맞춰 화병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기사가 아닌가 싶다.

노동절 이브에는 또 무슨 기사를 준비하고 있을까?

전두환 취임전날, 이명박 취임전날 부르던 "용비어천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밑도 끝도 없이 그나마 "바람직한" 사회제도들에 시비는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리휴강제도는 "한국에만 있어서 이상한 제도"가 아니라, 한국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따라 배울만한 제도라는 생각은 왜 해보질 못하는지.

"여성의 날"에 맞춰, 여성 건강관련 소비재에 대한 광범위한 감세와 공공재로써 가격조정이 대기업과 고소득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왜 논의꺼리도 되지 못하는지, 여성을 애낳는 기계로 생각하는 보건복지부의 신생아 정책에 문제는 없는지를 한번쯤 되돌아 보는 그런 기사를 쓸 기자가 조선일보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 수정: 여성이 아니다 보니 생리대 부가세 면제가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것을 몰랐네요. 수정했습니다. 실제로는 감세이후 가격이 더 상승했다고도 합니다. 한국적인 시장구조에서는 부가세 감세가 답은 아닌것 같고, 공공재로써 적극적인 시장개입과 통제가 보다 더 효과적일 것도 같네요. (http://blog.naver.com/grandchyren?Redirect=Log&logNo=46097412 참조)



** 추가 **

최근 2MB 정부가 52개 생필품 목록을 만들어 가격 관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거기 보면 45번재 항목에 "위생대"가 있다. 어떻게 잡겠다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록에 보면 "바지"가 생필품에 들어가 있는데 또 "치마"는 없다. 무슨 머리로 "빈칸 채우기 놀이"를 하시는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생리대의 공식 명칭이 "위생대"였나? 네이버 한글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위생대 명. 생리대의 북한말"이라고 나오던데, 뭐 뜻이 통하니 그것은 됐고...

한국어판 위키피디아

네이버보단 구글을 더 자주쓰는 취향상 한국 관련 검색도 대개 구글에서 하는데, 그러다가 들어가보게 된 것이 한글판 위키피디아였다. 사실 한국은 네이어 백과사전, 지식인, 엠파스 백과사전, 야후등등해서 이곳저곳에 산재한 온라인 백과사전이 있지만, 그 내용과 질에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백과사전 류와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몇년전에 두산동아 백과사전을 만들었던가 하는 사장이 나와서 국내의 척박한 백과사전 출판 시장에 대해 한탄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사전류 편찬 사업은 사실 국가 수준의 지원 속에서 각 학회가 담당해서 추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의 지도들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달리 영어나, 프랑스, 독어, 스페인어가 인문학적 소양에서 혁혁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전류, 백과전서류의 탄탄한 기본 토양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더구나 이젠 모두가 "공동집필"을 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같은 새로운 문서시스템도 정착되고 있는데 아직은 네이버 지식인 "내공"경쟁이 보다 더 네티즌들의 관심을 붙잡고 있는 듯.


 

가까스로 50,000 항목 이상에 들어간 한국의 위키피디아를 보고, 그나마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IT 강국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인터넷 활용패턴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식지도를 만들어가는 노력은,
마치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려내던 그런 열정과 지적 자주권에 대한 열망과 비슷한 것일 텐데...

서울대 맑스주의 경제학자 임용을 둘러 싼 논쟁과 "자본론"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는가 보다.
작년부터 김수행 교수가 은퇴하면 서울대 경제학과에 맑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새로 임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터져나오더니, 이젠 기정 사실화 되어가는 것 같다. 학부를 담당하는 과장도 대표적 발전론자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자 이영훈 교수라니 그나마 "배려"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듯 하고...
학내 사정이야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인데다가,
퇴임하는 교수의 관심사와 영역을 "땜방"하는 교수 임용이라는 것도 대단히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논리이기에 해당 과의 판단과 결정에 따를 일이겠지만, 오마이뉴스에 올라 오는 여러기사들을 보면서 착찹한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족 하나, 한국식 대학교수 "정년퇴임제"도 문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불난데 부채질 하는 격이지만, 나는 김수행의 비봉출판사 자본론 번역 판본을 지극히 혐오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강금실의 전 남편이 경영했다는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자본론 번역이 그나마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인데, 최소한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프트커버"라는 점에서 만도 그러하다. 빚만 남기고 출판사가 망해 강변호사가 그 빚을 떠 안았다니 이론과 출판사의 자본론은 그 자체로 참으로 기구한 역사를 남긴 셈이다. 물론 백의 출판사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판 자본론은 안타깝게도 "주체사상"의 빛에 가려 큰 관심조차 없었으니 논외로 하고. 

다시 김수행 역 자본론의 문제로 돌아가면, 내 혐오는 그가 번역판권으로 새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는 가쉽 같은데 있기 보다는, 가장 민중의 삶 속에 가깝고 노동자의 관점에 가까워야할 맑스주의 경제학의 "정전"을 숱한 한자 사용 번역으로,  무지랭이 비한자세대 노동자들로 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십오년쯤 전에 사회과학 서점에 꽂혀있는 김수행의 자본론을 보고 "화폐론"이라고 읽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 열사의 한이 서린 "근로기준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본론이 되어버린 셈인데, 그런 "대학교재"다운 번역이 아니었으면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시절 맑스의 주저를 번역하는게 가능하기야 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맑스주의 경제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고, 우리가 이미 목도한 바 역사적 시행착오의 역사였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10쇄 이상 찍어내는 그 세월의 한자리에서는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언어와 친절한 번역정도는 해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 그렇게 저렇게 겉돌던 맑스주의 경제학"사"가 한명의 교수가 퇴직하니 마치 맑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대학내에서 끊기고 말게될 것이란 "불안감"을 생산하고 만 것 아니겠는가?

언젠가 노무현은 자신의 무기력한 청와대 권력을 한탄하면서, 열명의 경제자문위원을 만나면, 그중 한명의 진보적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힘들다고 말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다수"의 의견을 쫒지 않을 수 없다는 핑계섞인 논리로 자신의 친 시장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민주주의적 이성"을 보여준 셈인데, 그의 정치적 무지와 무능력은 차지하고라도, 이땅의 맑스주의 경제학자라면 적어도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단지 신자유주의 경제상황하에 놓인 "시대"를 한탄하면서, 대학과 대중의 탈/반맑스주의적 경향을 "학적 다양성"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학적 구걸"행위 밖에 더 되겠는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가 공부하고 하고 있는 대학의 신문에, 공화당 대학생 위원회의 한 학생이 왜 "역사학과"에는 "보수학자"가 없는가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이 있었다. 사건은 옥스퍼드, 하버드에서 수학하고 상당수의 저작까지 가지고 있는 한 학자가 역사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것으로 부터 발단이 되었는데, 문제를 제기 한 학생은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인 역사학을 배울 "학습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학교자체가 갈수록 "진보적"이고 "맑스주의적"인 학풍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했었다. 요약하자면 "대학을 진보적 학자들이 장악했다"는 "폭로"가 그 글의 내용이었다.
이 사건이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자 "제국"인 미국의 한 사립대학의 일이라면 아마도 많은 한국사람들은 믿기 어려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학생의 "학습권 보장" "다양성 확보"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과에서는 자신들의 결정은 "학적 양심"에 따른 것이라는 짤막한 논평을 내놓았고, 대다수의 학생들도 대체로 이 상황을 문제 삼지 않았다.
거친 비교가 되겠지만, 이 상황과 한국의 작금의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학문의 역사, 혹은 학적 계보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다. 그것은 단지 시류를 한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사회와 투쟁하는 하나의 실천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실천은 "공부하는 자" "가르치는 자"등 학문의 생산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의 일차적인 소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맑스주의 경제학자 없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우려하는 여러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써는 지극히 정당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순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학적 실천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의 우려와 한탄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맑스주의 경제학이 "불필요한 학"의 범주로 치부되고 말았는가?
과연 맑스주의 경제학은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대학과 대학밖 사람들에게 제시 할 수 있을 것일까?

대학의 교수 자리 하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순간 맑스주의자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그와 같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펀드매니저"와 "컨설턴트"의 꿈만이 경제학의 최고봉에 걸려있을 때,
맑스주의 경제학은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파리의 연인"같은 드라마에서 성공한 CEO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자본론"을 꼽았던 것 처럼, 하나의 패션이자 악세사리 정도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일까?

그나마 정운영선생과 같은 논객도 사라진 이 시대에,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지 대학의 맑시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 마음의 숭례문" ? -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오랜만이었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 매체에서나마 보게 되는 것은.
박.노.해.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남한 노동자계급"을 대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대변할 만한 그.
여전히 본명인 박.기.평. 보다는 박노해가 익숙한 그의 이름을
다시 인터넷 신문에서 보게 되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선을 지지했던 안했 건 간에,
그와 내가 직접 안면이 있었던 아니건 간에,
박.노.해로 살아 온 그의 삶의 궤적과 내 삶도 한 때 먼발치에서 반향하며
소용돌이 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 서울의 유명 학원가로 진출한 담임선생이,
"네가 박노해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협박하던 그날은 아직 내 뇌리에 생생하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 주로 묵주 받으러 호텔에 가시는 정형근이 안기부에서 박노해를 취조하면서 했다던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박노해인양 한 인간에 대한 살의를 느꼈던 때도 있었다.
대학도 안나 온 노동자 주제에 그런 글을 썼을리가 없다며,
박노해에게 "배후"를 대라고 끝까지 추궁했다던 정형근은, 
시쳇말로 박노해를 "두번 죽이고"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싸잡아 무시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더니, "묵주신공"으로 위기를 타파하는 기술까지 보여준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그 후 박노해가 감옥에서 나오고,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는가 싶더니,
정형근 "심문효과" 였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여러 "엘리트" "지도층인사"들과 나눔문화던가 포럼인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저래 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덧없어,
벌써 몇년 전이 되어버린 이라크전 발발 당시 훌쩍 이라크로 떠났던 그의 모습도 아직 생생하고.
그는 돌아왔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포연과 통곡속에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아.....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의 숭례문"...

박노해의 시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글을 오마이뉴스에서도 봤지만, 레디앙에서 봤을 때가 더 충격이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789

사진도 박노해가 찍었고 시도 박노해가 썼다니 그의 작품이 맞긴 한가 보다.
솔직히 레디앙의 덧글에 누군가 거칠게 쓰기도 했지만, 박노해 이름을 지우고 보면, 중고등학생정도가 썼으면 교내 백일장이나 "야쿠르트 건강 글짓기"정도에서 입선 정도는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나마도 너무나 모범생적 강박을 지닌 어떤 이의 감상의 언어가 그득한...
 
아... "내 마음의 숭례문"이라니.....
그래... 시대가 변했고, 그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상에 격분하여,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시각"에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썼을 때 언급한 개인 일화처럼..... 이제 그는 서울역에 갈때마다 그 앞 대우 본사 화장실에서 가서 오줌을 갈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숭례문 야경을 찍는 여유는 있게 되었고,
김우중이 파산한 재벌에 늙고 병들어가는 사이,
그는 이제  "건강한" 명사들과 와인잔을 부딪치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고민하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 어쩌면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도, 사실 조금은 지겨운 내러티브다.
강산이 변해가듯 세상도 변해가고, 어느날 숭례문이 불타듯 인생도 화상을 입고 복원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무슨 "내 마음의 숭례문"이란 말인가?
무슨 얼어죽을 "600년을 지켜온 이땅의 자존심" 운운이란 말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아니고..

"내마음의 남대문 시장 상인"도 아니고,
"내마음의 서울역 노숙자"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박기평도 아닌 박노해가 지금 "내 마음의 숭례문" 타령을 해대냔 말이다.

아... 참을수 없는 한 숨이 그가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썼다는 시한편에서 터져나왔다.

숭례문을 인격화하는 그는 도대체 무슨 "불로장생" 불사조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그가 자기 성찰에 지나치게 매몰 된 채,
세상의 여러 아픔들, 정작 이웃의 고통은 이제 "대숲에 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의구심이 생겼다면 너무한 것일까?
대체 우리가 언제 부터 숭례문을 바라보며 삶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까?
숭례문 "애도"와 인터넷에서의 "지못미" 캠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인가?

어떤이의 시니컬한 반응 마냥 "노해"의 이름으로 "도사"의 언어를 뿜어내는 것은 이제 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해"의 길에 도사나 순진한 소년들의 언어가 들어찰 자리란 안타깝게도 없다.

불탄 숭례문을 바라보면서 "나누어"야 할 것은
그런 "풍금소리" 같은 감상이 아니고,
"불의 침묵으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숭례문이 아니라,
세상의 부정과 삶의 고난들과 맞서 살아온 민중들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