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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Kaleidoscope speaks.../to Hopping Dummies
2008. 2. 15. 18:40
"내 마음의 숭례문" ? -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오랜만이었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 매체에서나마 보게 되는 것은.
박.노.해.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남한 노동자계급"을 대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대변할 만한 그.
여전히 본명인 박.기.평. 보다는 박노해가 익숙한 그의 이름을
다시 인터넷 신문에서 보게 되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선을 지지했던 안했 건 간에,
그와 내가 직접 안면이 있었던 아니건 간에,
박.노.해로 살아 온 그의 삶의 궤적과 내 삶도 한 때 먼발치에서 반향하며
소용돌이 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 서울의 유명 학원가로 진출한 담임선생이,
"네가 박노해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협박하던 그날은 아직 내 뇌리에 생생하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 주로 묵주 받으러 호텔에 가시는 정형근이 안기부에서 박노해를 취조하면서 했다던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박노해인양 한 인간에 대한 살의를 느꼈던 때도 있었다.
대학도 안나 온 노동자 주제에 그런 글을 썼을리가 없다며,
박노해에게 "배후"를 대라고 끝까지 추궁했다던 정형근은,
시쳇말로 박노해를 "두번 죽이고"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싸잡아 무시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더니, "묵주신공"으로 위기를 타파하는 기술까지 보여준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그 후 박노해가 감옥에서 나오고,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는가 싶더니,
정형근 "심문효과" 였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여러 "엘리트" "지도층인사"들과 나눔문화던가 포럼인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저래 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덧없어,
벌써 몇년 전이 되어버린 이라크전 발발 당시 훌쩍 이라크로 떠났던 그의 모습도 아직 생생하고.
그는 돌아왔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포연과 통곡속에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아.....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의 숭례문"...
박노해의 시란다.
이 글을 오마이뉴스에서도 봤지만, 레디앙에서 봤을 때가 더 충격이었다.
사진도 박노해가 찍었고 시도 박노해가 썼다니 그의 작품이 맞긴 한가 보다.
솔직히 레디앙의 덧글에 누군가 거칠게 쓰기도 했지만, 박노해 이름을 지우고 보면, 중고등학생정도가 썼으면 교내 백일장이나 "야쿠르트 건강 글짓기"정도에서 입선 정도는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나마도 너무나 모범생적 강박을 지닌 어떤 이의 감상의 언어가 그득한...
아... "내 마음의 숭례문"이라니.....
그래... 시대가 변했고, 그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상에 격분하여,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시각"에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썼을 때 언급한 개인 일화처럼..... 이제 그는 서울역에 갈때마다 그 앞 대우 본사 화장실에서 가서 오줌을 갈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숭례문 야경을 찍는 여유는 있게 되었고,
김우중이 파산한 재벌에 늙고 병들어가는 사이,
그는 이제 "건강한" 명사들과 와인잔을 부딪치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고민하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 어쩌면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도, 사실 조금은 지겨운 내러티브다.
강산이 변해가듯 세상도 변해가고, 어느날 숭례문이 불타듯 인생도 화상을 입고 복원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무슨 "내 마음의 숭례문"이란 말인가?
무슨 얼어죽을 "600년을 지켜온 이땅의 자존심" 운운이란 말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아니고..
"내마음의 남대문 시장 상인"도 아니고,
"내마음의 서울역 노숙자"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박기평도 아닌 박노해가 지금 "내 마음의 숭례문" 타령을 해대냔 말이다.
아... 참을수 없는 한 숨이 그가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썼다는 시한편에서 터져나왔다.
숭례문을 인격화하는 그는 도대체 무슨 "불로장생" 불사조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그가 자기 성찰에 지나치게 매몰 된 채,
세상의 여러 아픔들, 정작 이웃의 고통은 이제 "대숲에 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의구심이 생겼다면 너무한 것일까?
대체 우리가 언제 부터 숭례문을 바라보며 삶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까?
숭례문 "애도"와 인터넷에서의 "지못미" 캠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인가?
어떤이의 시니컬한 반응 마냥 "노해"의 이름으로 "도사"의 언어를 뿜어내는 것은 이제 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해"의 길에 도사나 순진한 소년들의 언어가 들어찰 자리란 안타깝게도 없다.
불탄 숭례문을 바라보면서 "나누어"야 할 것은
그런 "풍금소리" 같은 감상이 아니고,
"불의 침묵으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숭례문이 아니라,
세상의 부정과 삶의 고난들과 맞서 살아온 민중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박.노.해.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남한 노동자계급"을 대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대변할 만한 그.
여전히 본명인 박.기.평. 보다는 박노해가 익숙한 그의 이름을
다시 인터넷 신문에서 보게 되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선을 지지했던 안했 건 간에,
그와 내가 직접 안면이 있었던 아니건 간에,
박.노.해로 살아 온 그의 삶의 궤적과 내 삶도 한 때 먼발치에서 반향하며
소용돌이 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 서울의 유명 학원가로 진출한 담임선생이,
"네가 박노해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협박하던 그날은 아직 내 뇌리에 생생하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 주로 묵주 받으러 호텔에 가시는 정형근이 안기부에서 박노해를 취조하면서 했다던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박노해인양 한 인간에 대한 살의를 느꼈던 때도 있었다.
대학도 안나 온 노동자 주제에 그런 글을 썼을리가 없다며,
박노해에게 "배후"를 대라고 끝까지 추궁했다던 정형근은,
시쳇말로 박노해를 "두번 죽이고"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싸잡아 무시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더니, "묵주신공"으로 위기를 타파하는 기술까지 보여준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그 후 박노해가 감옥에서 나오고,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는가 싶더니,
정형근 "심문효과" 였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여러 "엘리트" "지도층인사"들과 나눔문화던가 포럼인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저래 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덧없어,
벌써 몇년 전이 되어버린 이라크전 발발 당시 훌쩍 이라크로 떠났던 그의 모습도 아직 생생하고.
그는 돌아왔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포연과 통곡속에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아.....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의 숭례문"...
박노해의 시란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789
사진도 박노해가 찍었고 시도 박노해가 썼다니 그의 작품이 맞긴 한가 보다.
솔직히 레디앙의 덧글에 누군가 거칠게 쓰기도 했지만, 박노해 이름을 지우고 보면, 중고등학생정도가 썼으면 교내 백일장이나 "야쿠르트 건강 글짓기"정도에서 입선 정도는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나마도 너무나 모범생적 강박을 지닌 어떤 이의 감상의 언어가 그득한...
아... "내 마음의 숭례문"이라니.....
그래... 시대가 변했고, 그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상에 격분하여,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시각"에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썼을 때 언급한 개인 일화처럼..... 이제 그는 서울역에 갈때마다 그 앞 대우 본사 화장실에서 가서 오줌을 갈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숭례문 야경을 찍는 여유는 있게 되었고,
김우중이 파산한 재벌에 늙고 병들어가는 사이,
그는 이제 "건강한" 명사들과 와인잔을 부딪치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고민하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 어쩌면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도, 사실 조금은 지겨운 내러티브다.
강산이 변해가듯 세상도 변해가고, 어느날 숭례문이 불타듯 인생도 화상을 입고 복원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무슨 "내 마음의 숭례문"이란 말인가?
무슨 얼어죽을 "600년을 지켜온 이땅의 자존심" 운운이란 말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아니고..
"내마음의 남대문 시장 상인"도 아니고,
"내마음의 서울역 노숙자"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박기평도 아닌 박노해가 지금 "내 마음의 숭례문" 타령을 해대냔 말이다.
아... 참을수 없는 한 숨이 그가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썼다는 시한편에서 터져나왔다.
숭례문을 인격화하는 그는 도대체 무슨 "불로장생" 불사조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그가 자기 성찰에 지나치게 매몰 된 채,
세상의 여러 아픔들, 정작 이웃의 고통은 이제 "대숲에 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의구심이 생겼다면 너무한 것일까?
대체 우리가 언제 부터 숭례문을 바라보며 삶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까?
숭례문 "애도"와 인터넷에서의 "지못미" 캠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인가?
어떤이의 시니컬한 반응 마냥 "노해"의 이름으로 "도사"의 언어를 뿜어내는 것은 이제 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해"의 길에 도사나 순진한 소년들의 언어가 들어찰 자리란 안타깝게도 없다.
불탄 숭례문을 바라보면서 "나누어"야 할 것은
그런 "풍금소리" 같은 감상이 아니고,
"불의 침묵으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숭례문이 아니라,
세상의 부정과 삶의 고난들과 맞서 살아온 민중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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