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ck-eR/Giggling pumps 2009. 6. 18. 04:04

아침 단장 vs 대학원에서의 시간 (Ph.D Comics)


음.. 나는 처음부터 급격히 곡선이 곤두박칠 치기 시작했던 듯.
사실 아침시간 자체가 매우 위태로운 시간이고 대학원에서의 시간도 단 한순간 맘이 편하지 않았으니.
Click-eR/Resources 2007. 12. 5. 17:09

[펌] 노스캐롤라이나 근교+타주 여행지 정보

DKSA 게시판에서 퍼왔다. 3년이 되었는데, 안가본데가 대부분이다. 듀크 가든 빼고선.

===========================


  가영아빠(2007-09-16 23:59:45, Hit : 616, Vote : 29)
 근교 및 타주 여행지

제가 이곳에 온지 이제 2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주말에 다닌 곳을 가까운 곳 위주로 애들이 좋아하는 곳과 타 주 여행한것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도착하신지 얼마안되시는 분들은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어디 가실지 좀 답답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허접하게 정리해서 올리고 타주 여행은 전체 윤곽 참고되라고 대충 경로만 올립니다.

골프장은 제가 안해서 잘 모르고,,,, 하지만 정말 공부하기도 좋고 참 갈 곳 많은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딸애 친구네 가족들과도 주말 나들이도 하고 해서, 참 재미있는 추억이 깃든 곳이라 아마도 귀국하면 여기 추억을 드나들며 지내게 될것 같습니다. 주말과 방과 후에 여러 클래스에 데리고 다니다보면 오히려 반아이들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고 playdate 등 어울릴 경우가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모쪼록 시간들 내셔서 많이 여행들 하시고, 아이들에게도 시간 많이들 내셔서 여러 경험들을 시켜주셔서 값진 미국 생활이 되시길......

아이스크림 집: 제가 채플힐 도착해서 제일 처음 간 곳입니다. 처음에는 꽃길이 얼마나 예쁘던지......나중에 보니 여기 국도 길이 다 비슷하더라구요...그래도 아이스크림 먹으러다니면서 도로에서 유유자적한 사슴가족을 3번이나 만났습니다......차 앞에서 자기들끼리 반상회하는 지 5분 정도 봤습니다. 한번은 뒤에서 따라오던 경찰과 같이 차 멈추고 구경한적도 있습니다.
Mapleviewfarm, 채플힐에서 약 15-20분, 저녁에 1시간 정도 가족끼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갑니다http://www.mapleviewfarm.com/

1. Morehead Planetarium and Science Center
UNC-CH, CB #3480, Chapel Hill, NC 27599, (919) 962-1236
그냥 채플힐에 있어서 한번 들러보게 되는 곳입니다. 우주와 관련된 IMAX 영화 상영과 전시물이 있습니다.

2. Discovery Place
301 North Tryon Pl., Charlotte, (800) 935-0553
North Carolina Museum of Life and Science의 회원이면 무료입니다. 아주 좋은 시설로 볼게 많고 하루가 금방 갑니다. 바로 옆에 샬릿의 무료버스가 다니고 있어서 샬릿 구경도 같이 하시면 좋습니다. 쇼핑 좋아하시면 샬릿 도착 직전 우측에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아울렛이 있으니까 잠깐 들르셔 두 좋구요..초등학년 전부 유용.

3. Greensboro Children's Museum
220 North Church Street, Greensboro, NC 27401, (336) 574-2898
일요일에는 2불입니다. 유치원 저학년 3학년 미만 애들은 3 시간은 족히 시간때웁니다.

4. The Rocky Mount Children's Museum
1610 Gay Street, Rocky Mount, NC 27804, (919) 972-1167
새로 옮기고 레노베이션해서 깨끗합니다. 저학년 용

5. Lazy 5 Ranch
15100 Hwy 150 East Mooresville, NC 28115. (704) 663-5100
여기는 개인이 운영하는 사파리입니다. 3마일 정도를 자신의 차를 타고 가면서 혹은 따로 돈을 내고 마차에 타서 기린, 얼룩말, 타조 등 각종 동물에게 직접 먹이를 주는 곳입니다. 애들이 너무 좋아하지요. 얼룩말이 차안으로 머리를 디밉니다. 콧바람 세게 쏘면서,,,,,,

6. Natural Science Center of Greensboro
4301 Lawndale Drive, Greensboro, NC 27455, (336) 288-3769
3번 장소와 15분 거리에 있으니까 세트로 같이 다녀오셔도 좋구요…단 세트로 가시려면 일요일에는 오후에 여니까 한 군데만 갈 시간이 됩니다. 식사가 어중간하면 서울가든이라고 한국 식당/마켓이 5318 W Market Street Greensboro, NC 27409에 있으니까 식사하시고 장보고 오셔도 됩니다. 음식은 괜찮은 편이고 친절합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아참 여기 20007년 6월인가 부터 미니 동물원 개원했고 그런대로 볼만합니다. 시간 맞추어서 동물들 먹이도 주는데,,,호랑이 서서 먹이 받아먹는거 보시면 진짜 크네,,,소리 저절로 나옵니다.

7. North Carolina State Museum of Natural Sciences
102 North Salisbury Street, Raleigh, NC 27626, (919) 733-7450
전 개인적으로 워싱턴의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보다 여기가 더 좋았습니다. 가신 김에 의사당도 구경하시면 시간이 제법 갑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8. Imagination Station Science Museum
224 East Nash Street,Wilson, NC 27894, Phone (252) 291-5113.
드라이브 삼아서 64번 국도 타고 가볼만 합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9. North Carolina Museum of Life and Science
433 West Murray Avenue, Durham, NC 27704, (919) 220-5429
아주 좋습니다. 전 회원인데 정말 자주 갑니다. Explore wild life를 개장해서 좀 더 넓어진 느낌입니다. Summer camp가 좋다고 합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0. SciWorks
400 West Hanes Mill Rd., Winston-Salem, (336) 767-6730
조그만 농장과 wild habitat이 박물관에 같이 딸려있고 재미있습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1. Exploris
201 E. Hargett St., Raleigh, (919) 834-4040,
아주 교육적인 어린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번 회원이면 작년 10월부터 ASTC가 해당되어서 공짜입니다. 회원증 내면 밑에서 일하는 일반직원은 잘모르고 매니저 비슷한 좀 높은 사람이 confirm해줍니다. 근데 exploris member는 9번에서 공짜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네요...고참...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2. North Carolina Zoo
4401 Zoo Parkway • Asheboro, North Carolina 27205
여기 계시면 한번은 가시게 되겠지요. 요즘 동물들이 많이 활발해져서 좋습니다. 날씨 좋을때 가족 나들이 하시면 좋습니다. 도시락 싸가도 됩니다,. 원래 안된다고 하는데 검사 안합니다. 카페가 입구 중간 해서 3개가 있습니다. 음식은 핫도그 햄버거 샐러드 등이 있습니다.

13. NC transportation museum
411 South Salisbury Avenue, Spencer, N.C. 28159
5번 장소에서 20분 거리니까 같이 다녀오실 만 합니다. 기차는 모두 다 있습니다.
Salisbury trolley 타셔서 타운 구경도 하시구요. 유치원 4학년 이하 초등생

14. Old Salem
http://www.oldsalem.org/
가족 나들이 적합합니다. 마차 타시고 기분도 내시면 운치있습니다.

15. Sarah P. Duke Gardens and Duke Chapel
http://www.hr.duke.edu/dukegardens/dukegardens.html
뭐 듀크 계신 분들은 점심 드시고 산책하는 곳이지만 주말에는 가족들이 나와서 피크닉하기에 딱입니다. 안쪽 주차장에 주차하시면 무료고 입구 쪽은 돈 냅니다. 채플이랑 같이 한 바퀴 도시면서 가족이랑 듀크의 아름다운 교정을 감상하기에 딱입니다  

16. NC aquarium
http://www.ncaquariums.com/
wilmington에 있고 아기자기합니다. 가셔서 게도 잡고 바다 구경하시면 좋습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17. Chapel hill-Kidzu museum
http://www.kidzuchildrensmuseum.org/
개장한지 얼마 안되었고 프랭클린 사거리에 있습니다. 유치원생/1학년 초등생 등 작은 어린이들이 가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6세 이하

18. Metrolina Wildlife Park
4400 Cook Rd. Rockwell NC 28138, Phone: (704) 279-6363
개인 동물원이고 나름대로 특색이 있습니다. 먹이 줄 수 있습니다. petting zone있구요.

19. Biltmore Estate
http://www.biltmore.com/
유명한 곳이구요….저는 개인적으로는 별루…유럽에서 보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하도 유명한 집이나 궁전이 없다보니…그래도 남들 다 가는 곳입니다.

20. Chimney rock
http://www.chimneyrockpark.com/
가볼 만 합니다. 주로 스모키나 빌트모어 갔다오다가 들립니다

21. Grand Father Mountain
http://www.grandfather.com/
여긴 저도 아직 안가봤는데 natural center도 있고 볼만할 것 같습니다

22. Luray cavern (Shenandoah Valley)
http://www.luraycaverns.com/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윌리엄스버그 갈때 혹은 단독 코스 1박해서 아니면 새벽에 일찍 잠깬날 가족다 깨워서 무리해서 당일 다녀오실 만한 거리입니다.

23. Lost Sea
http://www.thelostsea.com/home.htm
스모키 갔다가 들리게 되는 곳입니다. 동굴에 큰 호수가 있어서 배를 타고 보는 데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24. Great smoky mountain
http://www.nps.gov/grsm/gsmsite/home/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지인들하고 케빈빌려서 가면 재미있습니다

25. Williamsburg-James town settlement-Yorktown
http://www.visitwilliamsburg.com/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가시면 hampton inn and suite에 묵으시면 후회 안 합니다. wet bar있고 거실이 따로 입니다. 비싸지도 않고...저녁에 도착하시면 호텔에서 자동차로 3분거리에 스미스필드에 있는 것 본다 엄청 큰 아울렛이 있으니까 쇼핑도 하시면 좋죠…  

26. Virginia beach
http://www.vabeach.com/
시원합니다…큰 다리 구경도 하고

27. Virginia Science center
http://www.smv.org/
더램에 있는 뮤지엄보다 규모가 큽니다. 25번 가면서 잠시 들렀었습니다

28. playspace
http://www.playspacemuseum.com/aboutus.html
7세 까지 재미있게 교육적으로 놀수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이쁘게 꾸며놓았습니다. 5불입니다. 근처에 7번과 11번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여러군데를 같이 볼수 있습니다.  유치원 1학년 이하 초등생.

29. Frank's Fun Park
http://www.frankiesfunpark.com/raleigh/attractions/
우리나라의 오락실과 같은 개념인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spider house/fun house/semi-drop shot등이 있고 처음에 가서 fun card를 machine에서 만들어서 충전하면서 씁니다. 대략 한번 카드 그을때마다 25-50센트가 나가고  티켓이 나오면 그걸 모았다가 점수에 맞는 상품을 타게됩니다. 근데 재미있는건 한번 씩 티켓이 안나올때가 있는데 직원 불러서 얘기하면 다시 작동해는데 이때 티켓이 많으면 한 300-400장 그냥 하염없이 나옵니다. 제 딸이 받아야 할것은 10장 정도인데...돈으로 따지면 한 30불을 잘 써야 되는 분량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전 망설이는데 딸이 냅다 직원한테 가서 뭐라고 얘기하더니 돌아와서 전부 가져도 된다고 했다고 하면서 전부 챙겼습니다...집에 돌아 갈때 딸은 당연히 커다란 인형을 자랑스럽게 챙겼고,,,,,,, 전 흐...흐.....


30. myrtle beach
한번은 가시게 되는 유명한 곳이지요. 그냥 물놀이 하러 갔었습니다.

31. 인터넷 뒤지면 horseback riding등 애들하고 같이 놀때가 제법 됩니다. 근처 공원도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이 많구요...9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raleigh의 fair ground에서 하는 festival도 미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사람들이 이렇게 노는구나 아...얼마나 심심했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가 보시면 처음엔 색다릅니다.. 주말 마다 다른 이벤트들이 있으니까 웹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http://www.southernhighlands.org/에 가시면 여기 근처에서 must-see해야 하는 중요한 관광지 정보가 있습니다.  

http://www.southfest.com/northcarolina.shtml에 가시면 축제 관련 정보가 많이 있습니다. 한곳 한곳 다니시면 그런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타 주 여행
1. 나이아가라 폭포-천섬-토론토-몬트리올-퀘벡 2006년 5월
유명한 곳이라서 더 이상 설명은....
나이아가라의 경우 1박2일로해서 근처를 보고
천섬은 토론토로 가면서 킹스톤에서 짧은 유람선을 이용하여 보았는데, 이 보다는 근처의 sky deck에 올라서 보는 경치가 더 좋았습니다. 한눈에 천섬이 광경을 볼수 있습니다.
토론토는 4박5일로 학회 참석 겸해서 city pass를 구입하여 관광지를 보았는데 grayline bus tour를 이용하여 볼 수도 잇습니다.
올드 몬트리올의 경우 http://www.tourisme-montreal.org/B2C/07/attraction_list.asp에서 골라서 보시면 됩니다. 여긴 2박 3일.
퀘벡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던 곳인데 2번 째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때는 아쉬웠습니다. http://www.quebecregion.com/e/에서 가고 싶은 곳 고르시면 됩니다. 2박3일.

2. Orlando and Boca Raton
모두 다 가시는 곳이니까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전 학회 때문에 3번을 다녀왔는데, http://www.quebecregion.com/e/에서 타운 홈 빌려서 묵었습니다. 디즈니 말고도 주경계에 있는 welcome center에 들리시면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사파리도 있고, Wannado city (http://www.wannadocity.com/index.php)라는 특이한 amusement park도 있는데 제 딸애는 지금도 한번 더 가자고 조르고 있습니다.

3. Everglade national park
꼭 가보시 길 권합니다. 자연그대로의 wildlife를 볼 수 있어서 꼬마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근처의 Fort Lauderdale에도 볼 거리가 많습니다.

4. Miami, Tampa and St Petersburg
마이애미는 그냥 도시였고 개인적인 느낌은 별로 였습니다. 근처 수족관과 이를 겸한 놀이 공원에서 근사한 쇼를 하는 곳이 유명합니다. key west인가요? 여기 가다가 들리시면..나머지 두 곳은 한적하니 여행하는 맛이 납니다.

5. Kennedy center
올란도 가는 길에 들러서 구경했는데 무지 크긴 합니다. 남자애들이 좋아 할 듯..

6. St. Augustin
올란도 가기 전에 들렀는데,,스페인 풍으로 괜찮습니다. http://www.oldcity.com/에서 정보 구하시면 되고 2박 3일이면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7.Savanah
SC Charlston가면서 들렀던 중간 지점입니다. 약간 퇴폐적인 느낌이드는 old city이고 1박 2일로 riverfront만 들렀었습니다. Elm tree들이 인상적입니다.

8. Charlston
2번 들렀었는데,,너무 유명한 곳이지요..한적한 church st를 여유롭게 걸으셔도 좋고 여유로운 riverfront park에 주차하시고 걸어서 historic district를 죽 둘러보시면서 이전 남부 시대의 유명한 저택들을 눈에 담으시면 평생 추억으로 괜찮을만한 도시입니다.  

9. Atlanta
심심할 때 그냥 2박 3일로 주말 여행했었습니다. stone mountain, coca cola museum (입장료 비싸고 볼건 없습니다만 콜라같은 청량음료는 무료입니다. 전 museum of life and science회원이라서 공짜로 보았습니다.), underground atlanta등이 그래도 가 볼만합니다.

10. Chatanooga
시간이 되시면 스모키 마운틴 가시면서 묶어서 가시면 three birds with a stone입니다. 볼거리가 많고 가족여행으로 적합니다. 전 Columbia-Charlston-Chatanooga로 5뱍 6일간 여행했었습니다. http://www.chattanooga.gov/

11. 루이지아나
뉴올리언즈도 시간이 되시면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마디그라 축제 기간이에느 ㄴ방접기가 어렵고 비싸서 그렇지만 일년내 축제의 맛을 볼 수 있는 프렌치 쿼터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swamp tour를 하면 루이지아나의 특이한 지형에 대한 ecologicla aspect도 특이한 경험이 됩니다. 여기에 auboburn zoo라고 있는데 아주 근사하고 특이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http://www.neworleansonline.com/

12. Montgomery
뉴올리언즈 가면서 들린곳 입니다. 한국 식당도 몇군데 있고 현대자동차 공자도 가다보면 멀리서 보이는데 기분이 묘합니다. old montgomery가 그냥 볼만합니다.

13. 볼티모어
학회 참석 차 들린 고인데,,port discovery에 가시면 아이들과 2일 정도는 재미있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14. 와싱턴-루레이동굴-뉴욕
다 가시는 루트이지요.

15. Alexandria
14번 다녀오면서 들린곳인데, 와싱턴 기념관이 볼만합니다.

16. Richimond
연휴 때 VA에 시간이 나서 들렀는데 크게 볼만한것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좀 식상하게 느낄만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17. 서부 여행
여긴 너무 넓어서 4번 정도는 가야지 수박 겉핥기로 볼 수 있는 곳 같습니다. 전 학회 참석으로 1번 개인적으로 1번 해서 2번을 다녀왔는데, siera nevada 를 경계로 해서 구경을 각 8박 9일 정도로 나누어서 했었습니다. 제가 자동차로 간 여정입니다.  
1) Las Vegas (Death valley/old Nevada/valley of fire/hoover dam)-Mt Carmel Jct (Zion/Bryce canyon National Park)-Page (Horse shoe/Marble canyon/Glen canyon dam/Lake Powel)-Flagstaff and sedona (Grand Canyon/Meteor crater/Sunset Crater Volcano/Wuptaki natl monument/Walnut canyon/Red rock/Airport Mesa/Bell rock/)Holy Cross Chapel-Phoenix 9downtown)

2)San Diego (old San Diego/Hotel del Coronado/Seaport Village/zoo and sea world)-Palm Desert (The living desert zoo and gardens)-Solvang (덴마크 마을/Santa Ynez valley)-Santa Barbara
County courthouse-Pismo beach (Hearst castle/Moro rock/Piedras Blancas Elephant Seals)-Yossemite park-San Francisco

18. 시카고
여긴 박물관과 시 공원이 아주 볼만합니다. 질리게 할 정도의 무지무지 큰 박물관들이 여행자를 맞이 합니다. city pass 끊어서 돌아다니면 50% 정도 할인이 됩니다. http://egov.cityofchicago.org/city/webportal/home.do

19. Kentucky Horse Park
http://www.kyhorsepark.com/ 아주 멋지고 각종 마장마술쇼는 다 볼수 있습니다. 진기한 혈통 좋은 말들은 다 볼 수 있습니다. 1억 2억,,,모두 억억 하는 말들 입니다.  

20. Cancun, Mexico
expedia로 예약하여 다녀왔고 애들은 꼭 돌고래와 함께 수영 해야 합니다.


Click-eR/Resources 2007. 11. 18. 14:35

[펌] U600 핸드폰 자바프로그램 설치

U600/U608 유저님들 게임 넣는 방법! | Miniskirt 해외유저

2007.08.08 15:26
minyeppy 일반멤
http://cafe.naver.com/anyultra/10900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길레..

간단한 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터넷에서 게임을 다운 받을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게임 화일은 확장자가 Jar 로 되어있는것을 찾으면 됩니다.

꽤 찾기 쉬워요. Google가시면 심심치 않게 구할수 있습니다.


화면 사이즈가 240*320 이어야 하겠죠. U600 이라면.

단 한국싸이트에서 다운받은 Jar 는 안되더군요. 한국게임을 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확장자가 Jar 와 Jad 가 있다면 두개다 받으셔야 하구요.

만약 Jar 밖에 있지 않다면, Jad 생성기라는 프로그램을 따로 다운을 받으셔서 (이것도 Google 에서 쉽게)

Jad 화일을 만듭니다. (생성기 돌리면 같은 이름으로 확장자만 Jad 로 바뀐 화일이 생깁니다.)

예) poker.jar, 그리고 poker.jad


이렇게 두 파일을 만드신후에 핸펀에 다른 파일 폴더로 옮깁니다. (usb 케이블로)

* 다른 파일 폴더로 밖에 옮길수 없어요.. PC Studio 로 옮기실땐..


두 파일이 다 옮겨지고 나선 핸펀에 이렇게 입력하세요

*#9998*4678255#

그러면 설정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 혹은, 어쩌구 Enabled 라는 메세지가 뜰거에요.


그후에 핸펀으로 다른 파일 폴더를 가서 Jad 확장자를 가지고 있는 화일에 가서 옵션을 누릅니다.

그리고 설치를 누르셔서 설치 하시면 자바세상에 게임이 설치가 됩니다.


설치하신후에 다른파일 폴더에 있는 두가지 화일은 지우셔도 게임은 할수 있습니다.


모든 게임을 설치 하셨다면, 다시 위에 코드를 입력하세요.

글머 해제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 혹은 어쩌구 Disabled 라는 메세지가 뜰겁니다.


그리고는 짜잔~ 게임을 즐기시면 됩니다.


허접한 설명이었지만, 아무조록 성공하시길 바라며,


즐겜 하세요~


- 참고로 게임이 설치가 안되거나 오류가 발생하거나 설치가 된후에도 게임이 안된다면, 그 게임은 U600/U608에서

할수 없는 게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땐 포기하세요. ㅜㅜ

Click-eR/Resources 2007. 11. 11. 17:23

앤디 워홀의 마오 1972

교양에 대한 시시껄렁한 잡설의 끝에...

그러니까 난 이런게 좋다.

User inserted image


Click-eR/Livelihood 2007. 8. 26. 08:41

U600 펌웨어 업글

http://cafe.naver.com/anyultra/6423

[U600/608] 펌웨어 업글~ | Miniskirt 해외유저

2007.07.19 14:01

(^^;)


펌웨어 업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초기버젼을 고집하시는 것 보단... 한층더 업글된 펌웨어를 설치하시는 게 좋죠.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이 향상되어 있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자신의 펌웨어 확인 방법!!!!


*#1234#를 누르시면... 윗쪽 상단에 자신의 펌웨어 버젼이 표기 됩니다.

(저의 경우는 뭣 모르고 업글 시킨다고 깝죽 대다가...  제 초기 펌웨어 버젼을 확인 못하는 불상사가.. ㅜㅡ)


처음에 많은 분들이 "U600XXGD2"버젼을 극찬을 하길래.. 무턱대고 시도 하다가 "Froze" 되더군요. 그래서

T-Mobile 펌웨어라는 "U600BOGD4"시도 했는데.. 역시나 "Froze" 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돌리나

약간 당황되서 인터넷 검색을 한참 하다보니.. T-Mobile 사용자분들중 "U600DXGE1"버젼에서 업글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받아서 설치 했는데.. 그 때서야 살아 나더군요 (한숨 돌렸습니다 --;)


* 펌웨어 다운로드 (^^)


http://homepages.pathfinder.gr/xux99/samsung/에서 "u600"을 선택하시면 펌웨어들이 나옵니다.

"처음으로 "U600 Optiflash"를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펌웨어 설치 프로그램 입니다."


* 펌웨어 설치 방법....


"Optiflash를 먼저 실행 시키셔서..." 펌웨어 화일을 설치를 위한 셋팅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다음의 경로에서 "Options > Settings > Generic" 아래 순서대로.. 설정 해주시면 됩니다.

1. Customer T: d830/d840/d910 (USB)
2. Flash Erase Passes' to '1'
3. Operation Passes' to 'Default'
4. Uncheck all checkboxes except 'Differences only'

 

4번의 경우는"Differences Only"를 제외한 모두 체크를 없애주라는데..

저는 다른 버젼의 펌웨어들이 설치가 안되고 "Froze" 되어 버리는게.. (--;)

4번 설정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의심 스럽더군요.


5. "Flash and Verify"에서 펌웨어를 찾아 주시면 됩니다. (s3 확장자)

6. "Default Contents"에서는 가끔 "s3"와 "cts"두개의 화일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cts 화일이 있다면

    지정 해주시고 없으시면 "S-Record only" 선택 하세요 ^^


이러써~ 펌웨어 업글을 위한 소프트 "Optiflash" 설정은 마쳤고... 다음은 셀폰작업입니다.


1. USB 케이블을 컴퓨터와 연결하여 "PC Studio 3"를 실행 시키세요.

2. USB 케이블을 연결한 상태에서 "배터리"와 "Sim카드"를 빼시면...

    (터치 패드와 가운데 버튼쪽에는 계속 라이트가 켜져 있습니다.)

3. "*"버튼을 누르시고 "power  on" 시키시면 컴터에서 컴포트가 연결 되는데..(다음 작업을 위해)

4. "Options > Settings > COM Port"에서 자신에 맞는 포트를 위하여
   "Control Panel > System > Hardware > Device Manager > Ports (COM and LTP))에서 자신의

   포트 넘버를 확인 하실수 있으며 "921600"로 설정 해주시면 됩니다.


이걸로써 업글 준비는 완료 된 겁니다. ^^


"이젠 flash를 실행 시키면 10분 여간 업데이트를 시작 합니다."

성공 하신분들은 펌웨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지... 특징 설명 부탁드릴께요.

B&O사운드가 한층더 향상 되면서 예전의 바보 사운드는 다시는 볼 수 없다네요.



Click-eR/Resources 2007. 8. 24. 15:33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인터넷에서 그리고 신문에서 속칭 "개념글"을 찾기란 쉽지가 않은데, 간만에 읽을만한 글이다.
누가 썼나 했더니, 유학 오기 전에 꾸역꾸역 읽었던 "근대의 책읽기"를 쓴 천정환이다.
이젠 교수가 됐구만. 축하할 일이다.

사실 근대의 책읽기는 자료의 압박이 상당해서 정작 근대의 책읽기가 어떻다는 말이냐를 그다지 강렬히 남기지는 못했었는데 학위 논문이었으니까 이해도 된다. "성실성"과 "가능성 (잠재력)"은 비슷한 종류인 것 같아도 다른 것이어서, 둘을 함께 요구하는 경우엔 대개 가능성(잠재력)은 성실성으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거나 표현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인간시대" "성공시대" 스토리가 지식인의 것은 아닌데도 대개 그렇게 밖에 한국에서는 안그려지는 것이고, 어찌 보면 그 연장선상에 "디워"도 있는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개념글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향한 생산"이 어떤 생산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여전히 "모범생"의 어떤 자리로 회귀하는 데, "대중의 생산"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 어차피 매니아에서 생산의 힘이 나오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에 대중생산의 기저를 맡겨두고, 지식인의 한계를 논하는게 논리적 모순 아닌가? "OO지역 교수 OO명 이명박 지지선언!" "박근혜 캠프의 OOO교수"들이 가능한 세상에서 어째서 "디빠" 교수는 안나오는가?
사실 대중은 이미 그 논리를 알고, 시비걸고 있는 것 아닐까? 
디워가 깐느 작품상  후보가 될거라고 기대하는  관객들 봤는가? 
대체 오늘날 지식인은 누구인가? "신지식인 심형래?" "문화 게릴라류의 진중권?" 아니면 천정환 자신?

무엇보다 "대중"으로 파악하는 이상 "카오스모스" 같은 문제설정 밖에는 할 수 없어지고,
그것을 향한 생산도 "공장제 기계공업"에 대한 "공장제 수공업"적 도전이거나, 포드주의에대한 포스트포디즘적 발상 전환을 쫒아가는 것 밖에 있겠는가? "생산"은 이미 초국적이고 지구적 상황에 놓여있는데.

그리고 대개 "문학"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언급하는 논지들은 "문학연구"를 결정적이고 본원적 기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기술자들의 "셀프 프로모션"이 지식의 장을 천박한 상업논리에 내주게 된 것 아닌가? "문화"-"문학"-"문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없어진 것이, 지식인들이 실상은 자기 생산엔 별로 관심 없고, 이행과 전환만 쫒아다닌 결과는 아닐까?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현대의 대중과 지식인 : ‘디워’ 논란

문화 연구는 대중문화가 모든 사회적 힘이 관여된 전장이며 늘 새로운 터라는 데 착안하고 있다. 영화 ‘디워’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테크놀로지의 문제, ‘괴수 영화’라는 장르와 수용의 행태, 그리고 배경에 있는 미국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은 ‘디워’ 수용과 논란에 개재된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거기에 바로 거대한 카오스모스로 존재하는 한국의 ‘대중’이 있다.

‘디워’ 논란은 아직 우리가 ‘대중’이라는 현상과 그 카오스모스를 잘 읽어내거나,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지식인’의 비평이 오히려 문화지체와 지적 한계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들끓는 대중 현상이야말로 ‘지식인의 죽음’을 확증해주는 듯하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몇 가지 해석의 도구 때문에 대중보다 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텍스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현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도구란 대중이 처한 현실 자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디워’ 논란만 보아도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중의 앎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단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강한 도전 의식과 소외된 자로서의 분노, 그리고 무차별한 향유의 정신과 상식적 윤리성, 또한 마니아적 집요함과 여러 분야의 지식을 나눠 가진 모순적 존재이다. 평소에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데서 서식하지만, 때론 한데 뭉쳐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방향과 반응도 진화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몇 줄짜리 ‘댓글’이 곧 대중은 아니다.

양심적이고 날카로운 한 문화평론가가 ‘디워’ 때문에 마치 공적처럼 돼버린 사태는 대중의 모순적 역동을 그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는 쉽게 사태를 애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추상’에 환원하고 대중을 ‘초딩’에 비유했다. 그는 전혀 공적도 아니고, 그의 ‘디워’ 평가도 옳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는 복잡다단한 현상으로서의 대중을 단순히 사상하며, 윤리적·문화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의식을 건드린 듯하다. 물론 대중의 파도 속에는 참주선동을 일삼는 음험한 세력이 언제나 끼어있을 수는 있다.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주체-수용자 현상을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 문화의 정치 경제학적 재생산과 개별 텍스트에 대한 분석·비판은 그를 위한 중요한 통로이다.

◆한국에서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

하지만 문화연구가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미술·문학·영화 같은 개별 장르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문화연구는 수용주체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와 돈,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깊게 문제 삼는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주지하듯 후기산업사회의 계급대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영국에서 탄생한 ‘시각’이다. 이는 대중과 엘리트,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는 효과를 지닌 입장들을 지칭했다. 그래서 문화연구는 하위 주체와 그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젠더 연구와 탈식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화 연구는 문학 연구의 밭으로부터 움이 터서 일구어지고 있다. 문학이 전 시대의 중심적인 양식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총체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예민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풍속·일상·문화제도·수용자·젠더 등에 대한 논의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구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화사나 문화 연구의 방법론을 참조해서 많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외에도 계급·젠더·민족(인종) 문제에 민감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그리고 전통적인 미학이 다 문화 연구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 연구는 인문-사회과학 내부의 ‘통섭’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편, 현실과 연구 및 현실과 비평의 연결 강도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현대 한국의 문화사가 제대로 서술된 적이 없고, 문화 재생산의 한국적 양상이 총체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문화과학’ 등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개 약진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와 담론이 어떻게 공통의 의제와 담론의 장을 만들 것인지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영미의 문화 연구가 가진 한계는 이미 지젝이나 스피박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문화 연구는 현실과의 연관이 미미해진 이론과 문학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본성상 대학 학과의 틀 속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라는 문제 의식 자체 속에 앎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연구도 서구 문화 연구 이론의 영향을 물론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끝없이 역동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문화 현실이 더 1차적이며 근본적인 문제틀이다. 오늘날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발걸음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는 소위 ‘선진국’의 이론에도 한 발, 또 현실에도 여러 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긴장력은 무조건 중요하다. 문화적 현실은 ‘지식인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문화 연구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의 영역을 지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앎을 종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적인 계몽이 불가능하고, 대신에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길임을 문화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화의 변화와 과제

어떻게 한국의 문화 연구는 공동의 주제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비판적 문화 연구는 계급과 성,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토픽을 다루지만, 그것은 ‘지금-여기’의 문화변혁의 의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2002년의 승리는 문화적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중성의 성격 변화와 한국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대중의 외부’도 없고 대중문화의 외부도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즉 삶의 양식) 전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그 활동과 소통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영역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성 변화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측면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서 돈은 얼마나 더 중요해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시끌벅적한 대중문화의 장이야말로 오히려 돈만으로 다 안 되는, 내지는 돈의 장악이 지닌 모순이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에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8대 2, 아니 9대 1 사회로 영구히 공고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불평등과 계급불평등은 이제 단단히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적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로 파급되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면적으로 문화적 양극화는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빈곤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로 문화의 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문화는 정치 문제이다.

그런데 문화의 양극화는 ‘반-경향’과 함께 관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상품만이 시장을 장악하여 대량의 이윤으로 회수되는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심각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추구는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성을 통해 구현되는 공통의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다른 한편 취향에 의해 수평적으로 준별되는 문화의 향유에로 달려가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

마니아(동호인·문화 부족) 현상은 일단 소요 자본과 진입장벽이 크지 않은 분야에서만 두드러지지만, 문화적 취향을 근대적인 ‘고급/저급’ ‘본격/통속’과 같이 위계지어진 것으로 구분하거나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특정 경제적 계급에 귀속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계급 구성과 정치·경제적 계급 구성 사이의 불일치, 또 노동과 향유 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항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의 괴리가 점점 더 복잡하고 커지는 양상을 띤다.

마니아는 대중의 존재성을 바꾸고 또한 강화한다. 그들은 지적 엘리트나 지배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앎을 개척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횡적 연대는 그 자체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참여군중(Smart Mobs)’ ‘대중지성’ 등이 운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제품(자동차, 패션, 각종 전자기기 등)과 특정한 대중문화 상품(TV드라마, 연예인, 영화 등)에 대한 동호인 문화는 이제 일상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소비제품과 대중문화 수용에 있어 마니아들의 도움을 얻고, 또한 스스로 마니아가 되어 비평하고 옹호한다.

거대한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선도하는 힘이 전위나 지식인이 아니라, 열정을 바치는 마니아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전통적 비평의 불가능함도 여기와 연관된다. 문화 연구도 생산되는 텍스트를 뒤따라 다니면서 주석 달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생산하는 앎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문화 연구가 ‘대중을 향한 생산’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 그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외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활용하고 필요한 만큼 긍정하고, 대중 현상에 배후에 숨어서 권력과 지배를 항구적으로 누리려는 세력에 저항하고, 대중의 역능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연대의 전선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앎의 연대 전선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순종과 발전주의의 나락에 빠진 대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과업과 관계 깊다.

〈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경향신문   2007-08-24 15:05:15

Click-eR/Resources 2007. 4. 28. 20:56

[오마이뉴스] 원자탄 부품공장, 돈 폭격 맞고 '예술 거리'로

작년에 중국에 갔을 때, "반드시 가야할 곳" 목록에 올린 곳 따샨쯔에 관한 기사가 났다.
군수공장인 줄은 알았지만, 원자탄 부품공장인지는 몰랐다.

나는 군수공장을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 해낸 노력이 보기 좋기만 하고, 부럽기까지 하던데,
그건 역시 여행자의 순진한 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여행자의 순진함도  공간만들기에는  아주 중요한  힘 아니겠는가? 여행자가 "아무데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지.

솔직히 나는 도시라는 공간에서는 공동묘지터도 아파트단지나 쇼핑몰로 변신하는 한국에 좀 질려있었던 터라,
공간의 생산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유적이 발굴 되도, 땅값 떨어지고 재산권 침해 당한다고 그 유적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이해도 되는" 사회가 아니던가?

인터뷰 내용에서 보 듯, 이젠 중국 화가들이 농부로 일해야하는 시대는 아니고 보면,
예술의 젊은 영혼이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고립되서 성장하기만 바라는 것도 너무 순진한 발상 아닌가?
그 옛날의 "순수예술"론의 재탕도 아니고. "예술엔 돈도 든다."
어쨌든 자본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지 자본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은 조금은 상투적인 지적인  듯.
 
여행 기억을 더듬어 보니, 베이징의 인사동이라던 그 전통 예술 거리는 798에 비해서는 많이 썰렁했던 것도 같다.
사실 자본의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예술계의 세대변화의 자리를 보는 것이 베이징 예술계를 보는 더 유효한 자리인 듯도 싶은데. BBC 같은 데서는 벌써 이미 그것에 주목하고 있고.
그나저나 그 거리 이름이 뭐더라? 그림도 한두장 샀는데 거기서는.
"따샨쯔"에서는 사진찍고 커피만 마셨지만...

내 사진은 다음에 올리기로 하고..

=========

▲ 봄이 오는 798거리 입구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공장 노동자들.
ⓒ 조창완

▲ 798 예술거리의 표지석
ⓒ 조창완
뉴욕에 있는 예술의 거리를 본따 '베이징의 소호'라고 불리우는 '798거리'는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지체에 빠진 중국 예술창작의 신천지인가, 아니면 예술가들의 상업성을 부추기는 구렁텅이일까.

사과꽃 향기에 봄이 익어가는 2007년 4월 중순의 798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798은 베이징공항에서 시 중심으로 향하는 중간에 있는 특수 지역을 말한다. 숫자가 말해주는 곳은 이 곳에 있었던 공장의 번호다.

그런데 이 곳이 5년 전부터 갑자기 변화를 시작해 중국 미술 등 예술문화의 바로미터가 되기 시작했다.

기자가 그 곳에 들렀을 때도 곳곳에는 새로운 전시를 위한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펑키 스타일의 예술가들과 아직 남은 공장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펑키 예술가와 공장 노동자들

길가에 주차한 차들을 보면 798이 얼마간 돈의 폭격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실제로 798은 생겨난지 4~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예술특구가 되면서 연 수백%의 성장을 하는 지역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폐공장의 가치가 급속히 상승한다는 것이다. 과거 ㎡당 몇 위안에 지나지 않던 월 임대비가 매년 급성장해 지금은 수십 위안을 호가한다.

하지만 이 곳을 향한 해외의 관심은 휠씬 더 강하다. 798로 불리는 따산즈와 인근 아라리오·이수청에는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 아트싸이드를 비롯해 카이스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표 갤러리, PKM 갤러리, 이음, 문 갤러리, 공화랑 등이 진출해 있다. 정치인 출신인 구천서씨도 초대형 규모의 '구 아트센터'를 5월에 문 열 예정이다.

그밖에도 동경화랑 등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적지 않은 화랑들이 이곳에 들어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온 조일행씨는 얼마전 798에 들렀다가 자신의 공부한 학교를 나온 프랑스인을 만나고, 동서양 예술 무대가 좁아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798로 상징되는 베이징 동북부 예술 지역은 당대 중국 미술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중국 정부 협조로 집중 기획 개발

▲ 두 시선으로 들어오는 이를 보는 조형물.
ⓒ 조창완
▲ 798을 비롯한 숫자는 과거 공장의 번호다.
ⓒ 조창완
798은 1957년을 전후로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베이징의 군수산업기지였다. 이곳에서 중국의 첫 원자탄 주요 부품이 탄생했고, 인공위성이 연구됐다. 하지만 도시 정비와 더불어 군수공장은 밖으로 이전했다. 몇 곳은 연구소로 바뀌었지만 거대한 공장은 흉물처럼 방치됐다.

그런데 이곳에 수년 전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앙상한 시멘트벽을 허물어 작업실을 꾸미고, 밖에는 자기만의 벽화나 조형물을 만드는 현대 예술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근의 이수청이나 아라리오까지 합치면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미술 단지를 형성한 것이다.

이같은 형태로는 상하이 쑤저우허 인근의 '뭐간산루'나 '신톈디', 광저우의 예술거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크기나 명성에서 798의 상대가 안된다.

798의 가장 큰 특징은 의도적으로 기획된 곳이라는 점이다. 중국 정부의 협조하에 집중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이후 이 곳을 부양하기 위한 정책이 나왔다.

이들은 순수한 미술혼도 있지만 기존의 권력과 유사한 힘을 찾기 위해 2006년 12월 2일 이곳의 한 갤러리에서 '798당대예술회'를 개최했다. 장야난, 이화, 장스용 등이 주도한 이 모임은 기존의 미협 등과 대칭되며, 자신들의 예술을 조직화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표어도 '지금의 798, 너는 당대에 있다, 798은 당대 예술모임이다. 당신을 위한 예술생활을 추구한다'. 구역을 당대로 축소해 기존 세력의 공격을 피하는 한편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려는 특성이 강하다.

'스타'와 '엔젤'이 만나니 콘텐츠가

798의 가장 큰 장점은 콘텐츠 창작을 위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798이 있는 따산즈에서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중앙미술학원이 있다. 이곳은 중국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저명한 학교다. 798과 유대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커리큘럼을 확충하고, 798은 이 학교에서 예술가를 수혈받는 공생관계가 되었다.

학교가 바탕이 되면서 기존 미술계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798의 탄생을 쉽게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중국 현대미술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도 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1976)을 거치면서 화가들이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10년의 문화공백은 넘기 어려운 골짜기였고, 상대적으로 미술협회 등 기존의 단체가 확보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거기에 엔젤 투자가 넘치는 것도 798을 성장하게 하는 힘이다. 중국 고급부동산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설치미술이나 현대 미술의 판로가 쉽게 열렸다. 결국 조직력을 갖춘 798 운영 주체가 학교, 미술가들이 결합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 798 공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이곳은 과거 표어들을 그대로 살려뒀다.
ⓒ 조창완
▲ 장샤오깡의 가족 시리즈 중 한 작품
ⓒ 조창완
이런 흐름을 바탕으로 798을 바탕으로 한 스타 미술가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798 이전에도 스타가 된 장샤오깡 등이 798과 호흡을 맞추어 준 것도 큰 힘이 됐다.

1958년생인 장샤오깡은 소더비 등 경제시장에서 작품당 기본 낙찰가가 30만불을 호가하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로 자리잡은 작가인데, 지난해 5월 798에서 신작전을 열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장샤오깡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통해 개인과 집단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으며, 최근에는 국내 미술 전문지인 <아트>지에서 특집으로 다루기도 한 작가다.

'인민을 위해 서비스하자' 그러나 "자본 결탁" 비판받아

하지만 798에도 혼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엄연한 사회주의 국가이고, 예술도 그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798의 홈페이지(www.798.net.cn)를 열면 '인민을 위해 서비스하자'는 마오쩌둥 문구로 시작된다. 21세기에 사회주의 문예좌담을 논하는 것은 복잡한 시선을 자아낸다. 실제로 798의 화랑 가운데는 사회주의 창작론을 소재로 삼은 곳들이 적지 않아 독특한 느낌을 준다.

한 서양화가는 최근에 798을 다녀오고 많이 실망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명성에 비해서 그다지 수준도 높지 않고, 싹이 트기도 전에 자본에 결탁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런 평가들에 대해서 중국 내부에서도 대부분 공감한다. 중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리시엔팅(68)도 우리 화랑인 '아트사이드'의 개관식에 참여해 "중국 작품가가 치솟는 것은 세계 속에서 중국의 문화적·경제적 지위향상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기 보다는 경제적 거품이다, 예술은 돈이 아니라 작가의 감각, 생각을 영원히 중요시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작가들은 알아야 한다"고 중국 작가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현상은 798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국 미술 시장에서 큰 손으로 불리는 에이전트들의 상당수는 부동산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상하이 등의 고급 부동산을 손대던 이들이다.

돈이 넘쳐서 주체를 못하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부동산에 대한 재투자 대신에 미술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고급주택에는 그럴싸한 미술품 소비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마오 주석을 소재로 한 조형물.
ⓒ 조창완
이들은 비중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규모로 사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중국 미술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름만으로 사놓은 작품은 이제 급등해서 부동산보다 오히려 효과적인 수익대상이 됐다.

그들은 갤러리를 만들어, 창고에 넣어둔 미술품들을 내걸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고평가 받는 박수근의 그림들이 최고 25억원에 팔린 반면에 중국의 미술시장은 아직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

이런 인프라 때문에 중국 내 자본은 물론이고 해외 자본이 들어오면서 798의 성장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반면에 예술 창작 수준이 하루 아침에 올라갈 수 없고, 거기에 배까지 부르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화됐다. 798의 급속한 부유화는 작가들의 창작력 저하를 낳기도 한다.

최근 젊은 작가들을 섭외하는 한 갤러리의 대표는 이제 그들과 최고급으로 약속 장소를 잡지 않으면 만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면서 미술계의 부유화를 꼬집었다.












"아직은 예선전, 본 게임은 이제부터"
[인터뷰] 짜오리 중앙미술학원 인문대학 학장

▲ 자오리 중앙미술학원 학장
ⓒ 조창완
- 798이 중국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798은 중국 미술계에서 이전과 다른 형태를 선보인 중요한 사례다. 이전에 중국 미술계는 관 주도였다. 미술협회 등의 조직이 전시회나 잡지를 움직이면서 이끌어갔다. 798은 이런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우선 개인 단위의 형태로 되어있고, 예술공간을 상업적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 미술의 개혁개방 형태라 말할 수 있다."

- 798의 수준에 대한 의견들이 많다.
"798은 따산즈 뿐만 아니라 지하철 터미널 근처의 이수청이나 아라리오까지 포함한 베이징 동북향의 단지를 총괄한다고 본다. 그 가운데 중앙미술학원이 있고, 그곳은 당대미술의 대표작가들이 머무는 곳이다. 우선 이름을 얻은 미술가들이 스튜디오를 열고, 신진들도 들어간다.

따라서 상당히 열정적인 공간이면서, 수준도 서서히 상승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이 곳 작가들이 입도선매의 대상이 되는 등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흘러간다는 비판도 있는데.
"사실 중국 미술은 이전에 상업성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미술은 서서히 상업성과 결합을 시작했다. 798은 미술과 상업성이 결합해 가속도를 내는 지역으로 보면 된다. 한국은 수십년을 두고 천천히 변했지만 중국은 아주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정일 뿐 마지막에 어디로 귀결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3~5년 정도가 지나면 평온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 부가 창작 능력을 약화시켜 궁극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지 않을까.
"창작혼이 평론이나 시장의 영향으로 인해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요구는 결국 창작의 룰을 일반화시켜서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팔리는 작품에 몰두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빈곤함을 통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미술가를 보기 힘들다."

- 중앙미술학원과 798은 어떤 관계인가.
"이 예술지역의 중심부에 우리 학교가 위치해 있다. 자원의 결합이라고 보면 된다. 화랑들과 협조를 통해 신진작가를 공급하고 있다. 사실 이전에는 학교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어서 출판이나 설계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에이전트를 만나 창작에만 몰두할 수도 있다."

-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궁극적으로 중국 콘텐츠나 창작의 혼이 얼마나 성장할 것으로 보는가.
"중국은 문혁 등을 통해 창작혼을 상실했다. 화가가 근 20년 간 농부로 생활한 후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에 지금은 그런 문제가 해결됐다. 그런데 창작품을 보면 천편일률적이어서 특별한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지금은 예선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그런 이후에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노력하는 과정이다."
Click-eR/Giggling pumps 2007. 4. 7. 05:54

Dirty Kuffar



자꾸 유투브에서 삭제되는 것은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때문인 듯 (2008년 링크수정)
 

오늘 TA 수업시간에 파키스탄 출신 강사가 학생들에게 보여준 뮤직비디오다. 보여준 이유는 지하드를 찬양하는 이슬람세력이 글로벌 미디어등을 이용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경각심" 혹은 "문제제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아이들은 조금 충격을 받았던 듯.

몇명의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사실상 미국도 이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으니 똑같은 거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왔다.

이후에 지속된 초청강사 브라언의 강의 중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슬람 카툰에 대한  논쟁은 흥미로웠는데, 그 카툰 논쟁 속에서 서구의 자유주의적 담론이 봉착하게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물음은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모욕이라는 폭력성이 교차하는 담론 구조에서, 그 교차 지형의 윤곽을 그려내고, 새로운 윤리적 논리를 도출해 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브라이이언의 고통에 대한 문제 제기.
좋은 고통과 나쁜 고통이라는 두가지 분기점이 항상 만들어진다는 점을 윤리적으로 강조한 부분이다. 
예를들어 의학적 시술에 뒤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과 그것의 수사적 가치를 전유하는 현실 정치와의 관계에대한 분석은 무척 흥미로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마취"와 "안정제"등등 고통을 잊게 하거나 감내 할 수있는 다양한 노력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닌가?
몸에 기록되는 고통의 흔적들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혹은 살아왔음을 확증하는 것 일텐데.
예수도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힌 전력에다가 그 고통의 극한에서 "순교"를 택한 이미지 때문에 먹어주는 것일 테고..

========


아래는 옵저버에 실린 노래 Dirty Kuffar 에 관한 기사다..


 Islamic rappers' message of terror


Antony Barnett Sunday February 8, 2004 The Observer


Islamic rappers' message of terror



Antony Barnett
Sunday February 8, 2004
The Observer


It's rap, jihad-style. A music video with blood-curdling images, fronted by a young British Muslim rapper brandishing a gun and a Koran is the latest hit in radical Islamic circles.

The rap song is called 'Dirty Kuffar' - Arabic for dirty non-believer - and it praises Osama bin Laden and the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re in New York.

The video has recently been posted on the British website run by the Islamic extremist Mohammed al-Massari, the UK-based Saudi Arabian dissident who has lived in Britain since 1994. Al-Massari claims that the video has been selling in large quantities at mosques to the younger generation and is in heavy demand overseas.

The rapper fronting the video calls himself Sheikh Terra and the Soul Salah Crew - a take on the rap group So Solid Crew. 'Salah' is Arabic for faith.

The video might at first be mistaken for an Ali G spoof, but the violent images quickly reveal it is no joke.

The song starts with images of US marines in Iraq cheering as one of them shoots a wounded Iraqi lying on the floor. At the end of the video, it features shots of the hijacked planes flying into the Twin Towers with sounds of the rappers laughing. There is then a list of 56 countries they claim have been the 'victims of American aggression' since 1945.

The four-minute rap is essentially a repeated diatribe against the 'dirty non-believers' Tony Blair and George Bush, urging listeners to 'throw them on the fire'.

One of the most brutal images shows a jihadist fighter in Chechnya riddling a captured Russian soldier with a Kalashnikov. Another image labels Pakistan president General Pervez Musharraf a traitor and shows photographs of Colin Powell and Condeleezza Rice with the words 'still slaves' superimposed across their bodies.

Labour MP Andrew Dismore said he was 'disgusted' by the video and is to refer it to the Home Office and ask the police to investigate if any offence has been committed.

Dismore said: 'These extremist are using music and video to prey on young and impressionable Muslim boys in order to attract them to their brand of lunacy and entice them to commit acts of terror. It is inexcusable.'

The website on which the video was originally posted is run by the Committee for the Defence of Legitimate Rights in Saudi Arabia, a group run by al-Massari who came to Britain in 1994 after being imprisoned by the Saudi regime.

He said: 'A boy came to me and showed me the video and I thought the content was good, although I am no expert on rap. I thought it was an excellent attempt to use modern methods to get a message across.'

Al-Massari did not see a problem in using Western music and MTV-like images to sell a message of jihad. He said that it was an effective way of attracting young Muslims who had been put off by other Islamic sects such as the Taliban, which banned music and dancing. 'I do not know of any young Muslim who has not either seen or got this video. It is selling everywhere. Everyone I meet at the mosque is asking for it.'

Al-Massari denied that the messages in the video incited Muslims to take part in terrorist attacks against the West.

He said: 'I believe the lyrics are only metaphorical. It is not like this is a fatwa.'

In November 2002, al-Massari circulated a 4,000-word message allegedly from Osama bin Laden. In 2001, al-Massari was granted permanent residence in Britain, five years after Michael Howard, then Conservative Home Secretary, tried to deport him.

Excerpt from 'Dirty Kuffar'
Peace to Hamas and the Hizbollah
OBL [bin-Laden] pulled me like a shiny star
Like the way we destroyed them two towers ha-ha
The minister Tony Blair, there my dirty Kuffar
The one Mr Bush, there my dirty Kuffar...
Throw them on the fire


Click-eR/Resources 2007. 2. 19. 14:58

[세계일보] 스탈린은 예비성직자이자 '시인'이었다

스탈린에 대한 기사가 왜 난데 없이 그것도 세계일보에 났을까 했더니,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이란다.
강제이주에 대한 부분은 일단 다음에 기회되면 고민해보기로 하고,
이 스탈린이 요즘 내 머리 속에도 자주 등장했다. 스탈린 주의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흔한 비판은 사실 손 쉬운 것이어서 더이상 할 말은 없고, 기사에서 잠깐 언급한 것 마냥 "멀쩡했던" 스탈린이 그렇게 변해갔던 정치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문제시 될 필요가 있을 듯.
스탈린이 독살됐네 하는 최근의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되었던 스탈린주의도 대중의 광기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박정희 주의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레드테러라고 불리우는 시기..(솔직히 이그나티에프라는 잘나가는 캐나다인이 자꾸 레드테러 레드테러 해대서 좀 불편해 하고 있는 중이다.) ....냉전시대 백색테러를 무색케하는 역사로 기록되어 되버렸지만..
쪽수로 대비를 한번 해줘야 하나?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인 듯. 그저 전시공산주의의 딜레마였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말이지...

박노자의 글을 보니, 트로츠키도 비운의 혁명가로만 보기엔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아.. 스탈린시대에 새롭게 재정된 러시아 "국가"의 역사가 궁금하다. 인터내셔날가를 포기했으니...)

==========================







스탈린은 예비성직자이자 '시인'이었다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소련의 초기 지도자 스탈린의 시(詩) ‘아침’이다. 믿어지는가. 히틀러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 러시아 혁명을 ‘반혁명’으로 뒤집은 세기의 무단아 스탈린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다니…….

사실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알고, 혁명가가 되기 이전엔 시인이었다. 그것도 성직자를 꿈꾸던 신학생 시인이었다. 그의 성장 배경과 환경을 보면 기가차다. 한 혁명가, 독재자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는지 전범(全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에서 스탈린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삶의 낙오자이자 비참한 주정뱅이였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아버지 베사리온은 구두장이였다.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구둣방이 실패하여 문을 닫자, 술을 퍼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비참한 가장이었다.

스탈린은 언젠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또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곤 자기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칼은 아버지를 빗나갔다. 잔뜩 화가 난 베사리온이 이오시프에게 달려들었으나 동작이 느려 그를 잡지 못했다. 이오시프는 그 길로 달아나 아버지의 화가 제풀에 풀릴 때까지 이웃에 숨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이오시프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열 살 때 종교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으나,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에게 호소해 아들을 구두공장에서 되찾아왔다. 어머니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16살이던 1894년 그루지야 수도의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직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미 1학년 때 신문에 시를 발표해 그루지야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가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그루지야 문학 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시인 스탈린은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레닌 등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신념과 시에 대한 열정을 버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을 앞둔 1899년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뒤로 하고 혁명가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는 평생 맹렬하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역사적인 인물, 특히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에 관한 책들은 수없이 읽었으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주석을 달아 가며 꼼꼼히 읽었다. 감옥에서도 유형지에서도 심지어 내전 때 전장에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개정판을 가지고 다녔다. 이 책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 내용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책 가장자리에 메모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전위 없이는, 유일한 (당인) 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없다.”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 역사, 경제,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사 전략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얼마 안 가 군사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저작을 써 온 스탈린이 1950년에 러시아 민족의 언어를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경쟁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글을 유려하고 논리적이고 사려 깊게 쓰는 지식인이었다.

1899년 혁명 운동에 뛰어든 스탈린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스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밀 지하 활동과 비합법적인 선전,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조하는 스탈린은 영락없는 미래의 볼셰비키였다(볼셰비키 파는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성립된다). 1902년 4월 처음 체포된 이후로 그는 몇 번의 체포와 유형, 탈출을 반복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이미 스탈린은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조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1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스탈린은 레닌의 요청으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마침내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스탈린’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철(stal)’을 뜻하는 러시아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정력적으로 볼셰비키 활동을 이끌던 그는 1913년 2월 마지막으로 체포돼 시베리아 북동쪽 끝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제정이 무너진 1917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소탈하고 겸손한 혁명가였다. 그는 지적으로 탁월한 다른 혁명가들처럼 거만하지 않은 동지였으며, 순박한 태도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친근한 동료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코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어떤 분위기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냉정하고 과묵한 그는 자신에 대한 경쟁자의 신랄한 비판 앞에서 분노를 감추고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자제력은 동료들 사이에서 전설적이었다.

스탈린은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레닌을 숭배하였다. 1905년 핀란드에서 레닌을 만난 이후 스탈린은 레닌의 충복으로서 믿음직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로 강도질을 하기도 했다. 두 그룹의 강도 집단을 이끈 스탈린은 사기, 강탈, 무장 강도를 통해 계속 당의 자금을 모았으며, 1907년 6월에는 지폐 운반 마차를 털어 25만 루블을 강탈해 레닌에게 보냈다.

레닌은 민족 문제 측면에서 스탈린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1913년에 발표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좋아했는데, 비러시아인에게 자율적인 행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해결책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족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예리한 분석은 레닌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가 필요 없다며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노동조합 논쟁으로 분파 간 논쟁이 격화되자 위기를 느낀 레닌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좌익 반대파 등 수많은 분파로 당이 갈라지면서 신생 소비에트 국가가 안으로 붕괴할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지방에서 레닌주의 지지자들을 조직한 스탈린의 도움으로 레닌파는 1921년 당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중앙 당 기구를 확실하게 장악할 사람이 필요했던 레닌은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 올리는 안을 직접 제출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자신이야말로 레닌의 적자라고 자임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정통성 경쟁을 벌였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혁명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트로츠키와 그루지야 시골에서 올라온 교양 없는 촌놈으로 폄하되었던 스탈린은 10월혁명 직후부터 사사건건 부딪쳤다. 내전 시기에 트로츠키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장교들을 붉은 군대에 받아들인 것은 투철한 계급 투사 스탈린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맞선 스탈린은 레닌이 도입한 신경제정책을 두고도 맹렬한 논쟁을 벌였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보였으나, 실제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하부에서 당원들을 설득하고, 자기 세력을 조직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그 누구도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 예상 못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레닌조차도. 그러나 스탈린은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본 정치의 천재였다. 권력 작동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그는 권력의 하부를 장악했다. 일반 당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각 하부 단위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강한 적과 연합하여 더 강한 적을 거꾸러뜨리는 이이제이 수법을 탁월하게 적용하였다. 그는 먼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해 트로츠키란 가장 강력한 적수의 힘을 제거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물리쳤다. 이때 연합 세력이었던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력화시켰다. 그는 서서히 노회한 혁명 투사들을 권력 핵심에서 제거하고 대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끌어올렸다.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이 자기 의지를 관철한 전제 권력자였다. 그는 공포를 일상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자신이 겪은 시베리아 유형보다 훨씬 가혹한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혁명 동지들, 의심이 가는 잠재적 배신자들을 몰아넣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공포 정치 기간에 약 150만 명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고, 이중 75만 명이 총탄 세례를 받고 사라졌다. 스탈린은 레닌 시절에 만들어진 좌익 반대파, 우익 반대파,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등등 모든 형태의 반대파들을 뿌리 끝까지 추적해 완전히 제거했다. 분파주의의 뿌리털도 남겨놓지 않고 도려내버린 비정한 근정 정치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한의 공포였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5개년 계획을 실시한 1928년부터 1940년 사이 소련의 공업 성장은 연평균 12∼14%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공업 생산량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국가로 부상하였다. 성공적인 산업화로 소련은 낙후한 농업국가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장은 테러에 의한 국민 동원이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도달한 것이었으며, 그 뒤에서는 농민, 노동자, 정치적 반대파, 소수 민족들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 로버트 서비스가 30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공포의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삶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전기 '스탈린, 강철 권력'(교양인)에 담겨 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Click-eR/Resources 2006. 9. 13. 12:10

슬라보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 출간

슬라보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 출간, 역자 인터뷰
/
/ 모던보이  2006-07-01 22:06:31, 조회 : 410, 추천 : 6
/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을 통해 본 ‘들뢰즈의 정체’

“노마디즘은 본연 철학과 거리”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이성민씨 인터뷰 전문입니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 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그 둘이 가장 가까운,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감히 추론입니다만은,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라캉과는 달리,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권위자들은 선생을,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
/
/
/ 지젝이라.../2006/07/02/20:32:08
/
/
참 좋은 말들이네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성민씨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라캉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이죠.
라캉과 들뢰즈는 각자 반대쪽의 방향을 향했다는 것을 유의하면 부분적 라캉주의자 지젝이 들뢰즈의 초기저작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왜냐면 정치적 영역은 철학적 영역보단 방향이 확고하기 때문이고 라캉의 개념과 접촉할 수 있는 부분은 들뢰즈의 정치적 저작보단 철학적 저작이 많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작업은 철학적 영역에서의 성취를 정치적 영역으로 전환시킨거고 라캉의 반대방향으로 더욱더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이 못마땅해 하는 건 당연한 것일 겁니다. 지젝의 저작-신체없는 기관은 결국 들뢰즈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상-헤겔적 라캉주의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젝의 들뢰즈 해석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
/
/
/
/
/ 글쎄요/2006/07/02/22:37:46
/
/
[신체 없는 기관]에서 지젝의 들뢰즈에 대한 개입은 몇몇 부분에서는 철저하지 못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적 체계가 가진 아포리아 - 도대체 실재의 두 층위는 어떻게 서로 만날 수 있는가 - 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젝이 들뢰즈와 들뢰즈-가타리를 구분한 건 사실이지만 이를 철학/정치의 이분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하군요) 물론 이러한 아포리아를 헤겔-라캉의 노선으로 봉합하려는 지젝의 기획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결국은 남근/부재하는 원인'이라는 결론 - 그건 정신분석학이 가진 한계와 난관을 일정부분 시인하는 것에 다름아닐 듯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타자'와 '실재' 라는 우리 시대의 인식론적, 정치적, 미학적 두 키워드가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만큼 난맥상임을 인정하는 하나의 지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주의자와 들뢰즈주의자 모두에게 - 나아가서는 지젝이 또 다른 대당으로 삼고 있는 데리다-레비나스 라인의 '타자성 철학'에게도 - '결과들'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결과들을 통해 사유되고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상호 마주침의 필요성을 고무한다고 봅니다. 영미권에서도 그쪽의 들뢰지안들은 이 책에 별다른 반응 없는 냉소로 대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도 웬지 그럴 듯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슬로베니아 학파가 이 점에서 한 가지 옳은 거라면 그들은 냉소주의 대신 '행위로의 이행'을 높게 평가한다는 거죠. 작금의 노마디즘 논의는 타자에 대한 냉소를 암묵적으로 깔고 진행되는 듯하여 씁쓸한 구석이 분명 있습니다. 하긴 김재인씨가 '문학동네'에 제기한 정당한 - 방법적으로 말입니다 일단 - 개념적 논박들에 이진경씨가 대응한 유일한 제스처라곤 '침묵'과 '냉소'뿐이었다고 하기도 하지요~
/
/
/
/
/
/ 지젝이라.../2006/07/03/01:39:11
/
/
아 그렇군요. 제가 이해를 잘 못했군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철학/정치는 너무 단순하군요. ㅎㅎ
/
/
/
/
/
/ 들뢰즈주의/2006/07/06/14:04:12
/
/
지젝은 비자발적 대상 의식을 환상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그 자체만으로도 지젝은 들뢰즈가 아닌 셈이지요...
/
/
/
/
/
이무영/2006/07/08/09:07:47
/
이런 게 정말 '문제'이긴 한걸까요-


*******************************
신체없는 기관... 요즘 지젝이 다시 보인다. 역시 죽어 관 못 하나 둘 뽑아 교통하는 네크로필리아들의 세계가 이 아카데미아라는 곳이지만, 살아 장도리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육실한 매력을 풍긴달까.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신체없는 기관의 첫 페이지에 들뢰즈가 얼마나 논쟁을 싫어했는지를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지젝의 타입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인터뷰 기사에서 느껴지는 도사 "톤"이 껄끄럽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깊이있는 인터뷰를 읽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저 이무영이란 사람의 마지막 댓글 "이런게 정말 '문제'이긴 한 걸까요?"는 압권이구만! 

'문제'이긴 한 문제는 없다는 사실을 그가 이미 안걸까?
아님 지젝 말따나 그는 '문제'를 모른다는 듯이 문제를 대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Click-eR/Resources 2006. 9. 5. 15:48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h21.hani.co.kr
  기사섹션 : 박노자의우리가몰랐던동아시아 등록 2006.09.01(금) 제625호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애국충성의 상징’이 남색을 즐겼다는 걸 일제 역사조작으로만 몰 수는 없어… 일찍부터 서구보다 자유로웠던 동아시아의 동성애는 다양성과 선진성의 증거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약 15년 전, 화랑에 대한 국내의 한 대표적인 논저를 읽게 됐다. 그 저자는 일본인들의 화랑 연구가 얼마나 왜곡됐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란 관학자가 화랑들을 동성애 집단으로 봤다는 사실을 소개해주었다. 아유가이의 학설에 대해 별다른 해석을 달거나 반박을 하지도 않은 채 말씀이다.

그 논저를 집필한 학자의 입장에서는 ‘화랑들이 동성애 집단이었다’는 주장이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는 낭설, 망설 그 자체였다. 애국충성의 화신인 화랑들이 변태를 업으로 삼았다 하니 우리에 대한 비하와 왜곡임이 자명하다는 이야기였다.

국선과 낭도 사이의 노골적인 사랑

물론 아유가이라는 사람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을 십분 이해한다. 일찍이 한국어를 익혀 1894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그자가 명성황후 시해 계획에 참여했다는 점도, 식민지 시대 내내 조선 고서와 골동품 등을 수집하면서 총독부가 원하는 대로 ‘조선 문화’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그를 ‘연구자’로만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아유가이가 악질적 어용학자라 하더라도 화랑들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꼭 어불성설로만 취급돼야 하는가? 물론 ‘화랑 정신’을 ‘우리 조상의 얼의 원천, 3·1운동 정신과 멸공 애국 정신의 원동력’으로 본 이선근과 같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학술적 하수인의 입장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애국의 표본인 화랑들이 ‘변태’였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독쯤이었던 거다. 그런데 동성애도 이성애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 하나의 사랑의 방법, 하나의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라는 더욱 진보된 생각을 갖는다면, 과연 화랑들의 동성애 가능성을 일제의 조작으로만 봐야 하는가?

국선과 낭도 사이의 사랑 관계를 노골적이다 싶은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를 아직 알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익히 아는 ‘모죽지랑가’를 대충 읽어도 뭔가 비상해 보이지 않는가?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전각(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

당신을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북쑥이 우거진 마을에서 잘 밤 있으리까? (양주동, 김완진 해석 참고)

물론 작가 득오곡이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 노쇠해 결국 세상을 떠난 스승 죽지랑에 대해 단순히 사제 간의 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아시아 고전시가에서 사랑과 자주 연관되는 ‘봄’이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등장하는가? 그냥 스승이 그리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 일이 있기 약 150년 전에 일찍이 죽은 친구 무관랑이 그리워 7일 동안 통곡해 슬픔으로 죽은 그 유명한 사다함도 무관랑과 우정 이상의 어떤 관계도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상당한 ‘순화 과정’을 거친 후대의 자료만 가지고 화랑을 논해야 하는 우리로서 확증이 없어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굳이 아유가이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화랑들이 후대의 유교적 사학이 아주 싫어할 만한 방향으로 성을 즐겼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실학자였지만 엄숙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호 이익(1681~1763)이 아유가이가 동성애 집단 이야기를 꺼내기 200년 전에 <성호사설>(제18권)에서 미남자로 뽑혀 얼굴에 분을 바르는 화랑들의 ‘음란하고 추악한 남색(男色)’을 개탄한 바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대 한국인들의 성적 개방성은 굳이 개탄해야 할 일인가?

조선시대, 여종과 궁녀 사이의 동성애

서구 각국에서는 교회가 약 12~13세기에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죄악시하기 시작해 그를 엄벌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 뒤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의 정도가 교회 세력의 강약에 의해 결정됐다. 동아시아 같으면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의 성왕인 세종은 궁중의 동성애와의 투쟁으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조선의 제5대 국왕 문종이 된, 세종이 무척 아끼던 세자의 둘째 부인 봉씨가 남편에게 소박맞자 고달픈 심정을 소쌍이라는 여종과의 동성애로 달랬다. 여종·궁녀 사이의 동성애는, 이성애의 기회가 별로 마땅치도 않은 궁중 생활 속에서 당시로서 보편화돼 있었으며 소쌍만 해도 이미 다른 여종과 동성애 관계를 가진 바 있었다. 그런데 봉씨가 그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고 심적 혼란에 안절부절못하는 소쌍을 공공연하게 독차지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눈감아주려 했던 모양인데 성품이 반골인 봉씨가 당시 여성의 ‘정신 훈련’ 교재인 <열녀전>을 배울 마음이 없다고 던져버리자 이데올로기적 도전을 받았다 싶어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열녀의 길을 거부한 봉씨는 1434년에 궁에서 폐출당해 부모의 집으로 쫓겨왔다. 딸의 반란 때문에 차기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봉씨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는가? 그는 허리띠를 풀어 딸의 목에 감아놓고 “자결하라”고 명한 뒤 본인도 곧 자결했단다. 세종은 봉씨 부녀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한편 궁녀 사이의 ‘음란한 짓’의 전통을 근절시키느라 더욱 애썼다.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풍속의 정화였겠지만 그 여성들의 처지를 생각해준다면 성적 억압의 심화로 봐야 할 듯하다. 성리학자들이 동성애를 남녀 교합의 도리를 위반하는 ‘괴변’으로 인식했지만, 함경도 지역에서 지방관들까지도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한다는 1890년대 후반 한 러시아 탐험가의 증언 등의 자료로 봐서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성리학을 국교화한 일이 없었던 동시대의 일본 같으면 동성애는 비록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정토종을 제외하고는 색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없는 승려 집단, 가족을 오랫동안 떠나야만 하는 무사 집단에게는 슈도(衆道), 즉 ‘중생의 도리’라는 것이 있었다. ‘중생의 도리’란 무엇인가? 승려의 경우에는 ‘치고’(稚兒·‘어린아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제자를 키우면서 그와 색정을 푸는 것이고, 사무라이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여쁜 시동과 사랑의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다. 주군의 총아가 되어 정치적 비중까지 가질 수 있었던 이와 같은 시동들 중에서는 16세기 일본을 처음으로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의 애인 모리 란마루(森蘭丸)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관헌의 간헐적인 단속이 있기도 했지만 유통경제가 발전됨과 동시에 성 상업화도 심해진 17세기 일본에서는 가부키극에서 ‘온나가타’(女形·여성의 역)를 맡았던 남자 배우들이 ‘남색’을 좋아하는 도시 부유층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슈도’라는 말이 문서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이지만, 고대 문헌을 봐도 동성애를 암시하거나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수많은 언급들을 볼 수 있다. 동성애의 전통은 이성애만큼이나 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 복건성, 동성부부 입양아까지 허락하다

동성애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조선 성리학자들이 중국 성현들을 우상으로 삼았는가 하면 중세 일본의 저술가들은 일본적 남색 풍토의 원산지로 중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실정은 어땠는가? 음양의 합침과 후사를 두는 일을 중시하는 유교 도덕에 위반되는 일이었지만 아편전쟁을 전후해 중국을 방문한 다수의 유럽인들이 중국 사회를 ‘변태의 천국’으로 묘사했다. 엄숙주의를 표면에 내세웠던 당대 영국인에게 이 풍토는 ‘타락한 중국 문명’에 대한 비하와 멸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동성애 탄압이 자행됐던 동시대의 유럽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그야말로 관용의 낙토였다. 동성애 남성 사이의 계약결혼까지도 가능했던 17세기의 복건성에서는, 이 ‘남성 부부’들이 입양아까지 들여 이성애자와 같은 가족 형태를 일시적으로나마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도덕주의를 통치 명분으로 삼았던 청나라에서는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곤장 100대를 쳐야 한다는 조항을 형법에 집어넣는 등 ‘도덕적’ 마녀사냥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물론 그래봐야 중국 사회가 사는 방법이 크게 바뀔 일은 없었다.

남한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변태”로 보는가 하면 그들과 견원지간인 북한의 <노동신문>은 동성애자에 대한 서방의 관용을 “세기말적인 부르주아적 타락”으로 몰아세운다. 극과 극이 서로 잘 통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12~13세기 이후의 유럽에 비해 동성애에 훨씬 관대해온 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다양성과 선진성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지역적 전통’을 꼽자면 이와 같은 전통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참고 문헌:

1. 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삼국유사>, 한길사, 2006.

2. 이경덕 편저, <성풍속으로 보는 일본 문화>, 가람기획, 1999.

3. 정성희 지음,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4. Bret Hinsch,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6/09/021109000200609010625041.html


copyright The Hankyoreh. han21@news.hani.co.kr
Click-eR/Resources 2006. 5. 6. 16:12

'죽은' 레닌 '산' 러시아를 괴롭히다

body topmargin=0 leftmargin=4 bgcolor="#FFFFFF">
'죽은' 레닌 '산' 러시아를 괴롭히다
[현지보고] 또다시 불거진 레닌묘 이장 논란
텍스트만보기   최광은(aganipe) 기자   
▲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의 묘.
ⓒ 최광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들어서면 붉은색 화강암으로 말끔하게 단장된 레닌 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고 마치 조그만 무대처럼 느껴지는 레닌 묘.

실제로 구소련 시절 붉은 광장에서 무슨 기념일 퍼레이드를 펼치거나 큰 환영행사가 있을 때 그의 묘는 단상으로 이용되었다.

최근 이 레닌묘의 존폐 문제를 놓고 다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해묵은 이 논쟁이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주목된다.

<역사의 선고>에서 시작된 해묵은 논쟁

이번 논란 재개의 발단은 외형적으로 대통령도 정치권도 아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한 보고서로부터 시작되었다. '반공산주의 당 선언'으로도 불릴 수 있는 <역사의 선고> 보고서의 한 대목을 우선 보자.

"주권국 러시아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적색테러와 사회주의 혁명 수출의 상징과 같은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민주주의적 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역사학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레닌과 스탈린은 인류에 반하여 시효가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법률적으로는 유족들의 뜻에 반하여 유골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보고서는 레닌 묘를 철거하는 데 법률적 걸림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했다.

"레닌 형제자매와 부인의 뜻은 심지어 임시 묘소의 건립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문서상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레닌의 사후 시신의 보존 방안에 관해 논란이 있을 때 단지 간접적인 증언으로 등장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레닌 묘 건립 이후에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정작 레닌 자신은 사후에 샹트페테르부르크 볼코비 수도원 묘지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레닌의 유언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으며, 그의 생전에 공식적으로 천명된 바도 없다.

현재 그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 올가 드미트리예브나 울랴노바는 단호하게 레닌묘의 이장을 반대하고 있다.

한편 <역사의 선고>는 "정부는 납세자들의 돈을 공산주의 당 지도자 시신의 유지, 검사, 복구에 지출해서는 안 된다"며 경제적인 이유까지 들어 레닌 묘의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레닌 묘 보존지역 자선사회단체' 의장인 알렉세이 아브라모프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공산주의 당 지도자의 시신 보존과 관리를 위한 비용을 정부가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은 지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모든 비용은 우리의 기금과 다른 몇몇 조직들이 지불한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

결론적으로 <역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은 방안의 실행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붉은 광장의 레닌 묘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19세기 말의 모습처럼 '비정치화된 외관'을 광장에 돌려준다. 둘째, 레닌, 스탈린을 비롯한 '대중 억압의 책임이 있는 다른 인물들’의 유해를 친지 혹은 그 계승자들에게 돌려준다. 셋째, 도시, 거리, 지하철역 등의 명칭에서 레닌,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의 이름을 제거한다. 넷째, 그들의 동상을 박물관으로 옮긴다. 다섯째, 크레믈린 망루에 있는 루비색의 별 장식을 황금 독수리로 대체한다.

정치권의 선택

▲ 무덤에 잠든 뒤에도 좌우될 운명이 남아 있는 레닌.
ⓒ 최광은
그런데 이 보고서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성과정에도 여러 가지 의혹이 일고 있다. 우선 이 보고서의 최종 서명이 연구소장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아닌 부소장 블라디미르 라브로비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 의문을 낳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보고서를 하필 왜 연구소장이 휴가 갔을 때 부소장이 결재했을까 하는 점이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언론들의 추궁에 <역사의 선고>는 "연구소의 견해"라고만 말할 뿐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이러한 의혹은 레닌묘의 보존을 지지하는 측뿐만 아니라 정작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발레리 꼬즈로프는 지난 달 17일 <이또기>와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직접적인 정치적 계략"이라는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또한 "아카데미 연구소들은 공공기관으로서의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더욱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여기에 어떤 분명한 주문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 알렉세이 아브라모프는 이러한 묘지 제거 캠페인의 선동자와 주문의 실체가 행정부의 고위 관리 중 하나가 아니겠냐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은 현재 신중하게 이 문제를 보류하고 있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고 여지를 남겼다.

그가 푸틴 대통령의 의중에 대해 이 같은 생각을 품는 것은 사실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푸틴 대통령은 수차례 레닌 묘의 철거를 시도했으나 매번 잇따른 정치적 위기로 성공시키지 못한 전 옐친 대통령과 분명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레닌 묘 처리 문제와 관련, 가타부타 언급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다만 올해 2월 스페인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레닌 묘의 운명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을 뿐이다.

"나는 국민들 다수를 계속 짓눌러온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곳 정치평론가들의 상당수는 현재 문제해결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러시아역사연구소 보고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마 부의장,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통합러시아당의 주요 인사들, 기타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문제가 그리 간단히,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와 보존의 문제를 떠나 러시아 정치의 중심으로 파고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년 대통령 선거라는 커다란 정치 일정을 앞둔 정치적 이해득실 계산은 이 문제의 해법과 그 실행을 제약하는 큰 변수이다. 레닌묘를 비롯하여 크레믈린 성벽 아래 있는 400여 개에 달하는 무덤(유리 가가린, 막심 고리끼의 것도 이들 중에 있다)의 제거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대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도 다양한 입장을 갖고 있다. 한 칼럼니스트는 "문서상으로 공산주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실제로 무덤을 파내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것이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원장 유리 오시포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불사르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만일 각 세대들이 이전 세대의 결과물들을 제거한다면, 그로부터 아무런 훌륭한 것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

만일 레닌 묘를 둘러싼 해법이 2008년 대선 이전에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실행은 대선 이후에나 가능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러시아의 탈소비에트화 프로그램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상징의 제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상징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필자에게 결정 권한이 있다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냥 두면 안 되나

결론부터 말하면 상징을 고집하는 쪽도 상징의 제거를 고집하는 쪽 어느 곳에도 찬동하기 어렵다. 그냥 있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새롭게 길을 가면 어때서.

그러나 붉은 광장을 지나칠 때면 항상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되곤 한다. 붉은 광장 입구에는 레닌을 꼭 빼닮은 사람이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자신과의 기념촬영을 대가로 그는 돈을 번다. 그 사람을 볼 때면 그 곳에서 차라리 죽은 레닌이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뒤흔든 한 혁명가의 모습이 그런 초라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는 느낌은 유쾌하지 않다.

매주 토요일 점심 무렵에는 일군의 공산주의자들이 레닌 묘를 단체로 참배한다. 그들은 현재 러시아연방공산당을 부르주아지 정당에 가깝다며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레닌 묘 앞에서 약식 집회를 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차례차례 레닌을 알현한다.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레닌그라드라고 부르길 고집한다. 그들 앞에서 페테르부르크라고 부르다가 야단을 맞은 기억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신실한 레닌주의자들을 떠올리면 '레닌을 그냥 그대로 그 곳에 두지'하는 생각도 든다.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는 레닌, 아무튼 그는 모진 운명을 타고 난 것이 분명하다. 무덤에 잠든 뒤에도 좌우될 운명이 남았으니 말이다. 내가 붉은 광장의 레닌 묘를 보며 할 수 있는 일은 주문을 외는 일밖에는 없다.

"레닌에게 영원한 안식을!"
필자는 러시아국립사범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습니다.

2006-05-05 18:54
ⓒ 2006 OhmyNews
* 기사원본주소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28787
Copyright 1999 - 2006 OhmyNews all rights reserved.
Click-eR/Resources 2006. 4. 29. 08:00

정신분석의 아버지, 150년을 살아 숨쉬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150년을 살아 숨쉬다
[해외리포트] 오스트리아,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 축제분위기
텍스트만보기   배을선(shemish) 기자   
▲ 1921년의 프로이트
현대 정신분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올해는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고, 오는 5월 6일은 그의 탄생일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그의 1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들이 열릴 예정이다.

물론, 그를 기념하는 행사는 프로이트가 47년 동안 거주한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한 곳인 비엔나 9구의 베어르그가세(Berggasse) 19번지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이곳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으나 지금도 그가 환자들을 상담했던 상담실, 글을 쓰던 작업실, 진료를 기다리던 대기실 등은 가구들만 빼고 그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베어르그가세 19번지'와 그가 사용했던 유명한 정신상담용 소파 '카우치(Couch)'는 '심리분석'과 동의어로 불린다.

평생 인간의 정신세계를 연구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프로이트. 하지만 그도 삶의 희로애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말년에는 지독한 병마에 시달렸다.

나치 피해 영국 망명... 누이 넷은 가스실에서 죽음

프로이트는 1856년 구 체코슬로바키아(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의 모라비아 프라이버그에서 태어났다. 4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특했던 프로이트를 위해 그의 부모는 없는 살림이지만 그가 책을 읽을 때마다 남포등을 켜주고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는 촛불을 켤 만큼 학업을 장려했다고 한다.

무의식과 성격 이론

프로이트는 마음을 빙산에 비유해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부분이 '의식'이라면, 물 아래의 훨씬 더 큰 부분을 '무의식'으로 보았다.

그는 무의식이 생명에 대한 하층구조로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임을 강조하며 그것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프로이트는 40여 년에 걸쳐 '자유 연상'의 방법으로 무의식을 탐구했고, 이를 토대로 독특하고 포괄적인 '성격 이론'을 탄생시켰다.
비엔나국립의대를 졸업한 프로이트는 신경학, 꿈, 성, 죽음 등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해 무수한 논문과 저서 등을 발표했다.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페티시즘, 유아의 성욕, 항문에로티시즘, 여성의 불감증 등 범상치 않은 이런 용어들을 입에 담은 대가로 프로이트는 젊은 시절 비엔나의학연구회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현대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학회는 75세의 노장 프로이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이 유태인 심리학자의 목숨도 위태로워졌다. 합병 3일 후인 3월 15일 나치는 평화롭던 베어르그가세 19번지로 쳐들어와 이 세계적인 석학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가족들이 소지한 현금과 여권을 빼앗아갔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쇄한 프로이트 박사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압박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프랑스의 여성심리학자 마리 보나파르트가 애쓴 결과 그는 딸 안나와 함께 3개월 후인 6월 15일 영국 도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극적이었다. 보복으로 나치는 프로이트의 누이 넷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 잔인하게 살해했다. 당시 누이들은 모두 칠십을 넘긴 고령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도착한 프로이트 앞에는 나치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프로이트는 런던에서 한 차례 더 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생체조직 검사에서 악성종양을 발견한 의사들은 프로이트에게 수술이 불가능한 불치암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939년 9월 23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런던에서의 삶을 고통으로 보냈다.

골초 프로이트, 시가와 커피 없이는 못살아

▲ 프로이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프로이트가 피우던 시가.
ⓒ 배을선
1923년 처음 암 선고를 받았으니 프로이트는 죽기까지 무려 16년을 고통 받았다. 그에게 암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시가'였다.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살 정도로 골초였는데 특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아직도 그가 즐겨 피우던 시가와 시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평일에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일요일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적어나갔는데 이럴 때면 항상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온몸에 암세포가 퍼지면서 그는 두 가지를 단념해야 했는데 바로 담배 피는 것과 저술 활동이었다. 담배를 끊은 후 프로이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담배를 끊은 것보다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더 슬프다."

▲ 카페 코어브. 프로이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커피를 마시곤 했던 카페. 지금도 유명한 카페하우스 중의 한 곳으로 남아 있다.
ⓒ 배을선
또 그는 담배뿐만 아니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발병 이후에는 커피도 삼가야 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보티브성당 앞의 공원을 거닐다 자신이 재직하던 비엔나국립대학교의 도서관으로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아마 프로이트는 속이 출출해지면 대학교 앞의 전통카페하우스 '카페 란트만'에서 커피 한 잔과 토르테 한 조각을 즐겼을 것이다.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카페 코어브'는 그의 단골 카페였다. 프로이트는 자주 이곳에 들러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사색을 즐겼고, 동료 학자들과 비엔나심리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독한 시가와 쓴 커피를 입에 댈 수 없게 됐다. 그 괴로움이 컸던 탓일까. 프로이트는 마사 버네이즈에게 "외롭지만 않다면 건강한 게 최고"라고 말했다.

암의 고통,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살고 싶다

▲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걸려 있는 프로이트 그림.
ⓒ 김성수
죽음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지만 프로이트도 죽음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 못하고 젊음을 부러워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에게 그는 "여든 살 된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는 대화거리가 못 되네"라며 "젊음이 최고"라고 말했다.

또 한 미국인 방문객에게는 "젊음에 가치가 없다는 것은 진실과 반대입니다. 젊음이야말로 유일한 가치죠. 늙은 게 뭐가 좋습니까? 특히 여자들은 늙으면 흉해지죠. 남자들도 다를 바 없지만!"이라고 농담을 했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측하기도 했으나 맞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이복형제 임마누엘이 81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신도 81세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도 81세를 넘기자 어머니가 사망한 95세에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81세도, 95세도 아닌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프로이트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런던에서 받은 세 번째 암 수술 이후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특히 턱뼈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이러한 통증, 혹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더욱 집필에 열중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기 위해 진통제를 거부하기도 해 가끔 의사와 다투기도 했다. 그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혼미한 정신보다는 맑은 정신을 갖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모세라는 인물과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8)를 탈고했고 <정신 분석 개론>(The Outline of Psychoanalysis)을 써나갔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조바니 코스티간은 "그가 고통 속에서 쓴 저서들에 진부함이나 지루함은 없다.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럽던 기간에 쓴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없다. 다만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이 넘쳐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고 밝혔다.

영원히 불멸로 남을 프로이트

▲ 베어그가세 19번지. 프로이트가 47년간 살았던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지금은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프로이트가 살았던 그대로를 전시하고 있다.
ⓒ 배을선
하지만 말기의 프로이트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암세포가 피부를 뚫고 나와 눈 주위까지 감염됐으며 세균에 감염된 피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갔다. 1939년 9월 21일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치의 슐 박사에게 말했다.

"자네 더 이상 살아갈 가망이 없을 때 나를 편안하게 가게 해주겠다던, 그 약속 잊지 않았지?" 결국 슐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프로이트에게 모르핀을 투약했고 그는 끔찍한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잠과 같은 죽음을 맞았다.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고 인생을 그대로 직시했다. 그는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죽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불멸입니다."

정신분석의 안소니 스토는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조언을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소리에 오랜 시간 귀를 기울인 프로이트의 기술이야말로 현대적 형태의 대부분 정신치료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은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말했다.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딱딱한 심리학개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추억'과 '대화'를 통해 150년을 살고 있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단 하나의 불멸이 아닐까?
2006-04-28 11:42
Click-eR/Resources 2006. 4. 10. 08:50

국제 환경 협약 참고 자료

◆ 국제법.국제 관례는=정부의 대중국 황사 대책은 국경을 넘는 환경오염 행위에 대한 국제법 해석과 맞물려 있다. 1972년 채택된 스톡홀름 인간환경선언은 "모든 국가는… 자국의 환경이나 자국 관할권 외의 지역에 피해를 일으키지 않을 책임이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국제 관례는 다른 나라에 주의 의무를 통보할 책임이 있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 피해를 일으킨 국가에 책임까지 지운 사례는 없다.

1930년대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트레일 제련소 사건'은 대표적 국가 간 환경오염 문제이나 제련소 측과 피해자 간 민사소송이라는 점에서 황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건은 미국 접경 캐나다의 트레일 제련소가 미국 워싱턴주 사과농장에 아황산가스 피해를 일으키면서 농가가 미국 정부에 개입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양국 정부는 이에 따라 양국과 중립국 인사 3명으로 구성된 중재재판소에 이 사건을 회부했고, 재판소는 캐나다 측에 40만여 달러를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국가 책임의 원칙은 제시했지만 현재의 국제 관례상 이런 판결이 다시 나오기는 불가능하다는 분석들이다. (소병천 법학박사)

이에 따라 중국.몽고발 황사 해법도 유럽의 다자협력 접근 방식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79년 유럽 이외의 국가를 포함해 33개국이 서명한 '장거리 대기오염 물질 이동에 관한 협약'은 대표적 예다.


[중앙일보 2006-04-10 06:02]



Click-eR/Resources 2006. 4. 3. 01:08

[베트남전문서 발췌] 참전 7개국 정상회담

[베트남전문서 발췌] 참전 7개국 정상회담

= 정상회담 날짜 변경과 관련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한국의 사카린 사건을 언급한 대목이 있음 =

◇ 주미대사-레오나르 웅거(Leonard Unger) 미국 월남문제 담당 부차관보 문답( 66.7.9.주미대사 보고)

- 주미대사 =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북한 괴뢰는 지원병 파병 운운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또한 왈쏘(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도 만일 북월맹이 원한다면 지원병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한 사실을 들어 문의.

- 웅거 차관보 = 북한 괴뢰의 지원병 파견운운은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비난성명중의 일부로서 당장 파견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으나 과거에 비하여 일보 더 나간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왈쏘조약기구 국가들의 지원병 파견운운은 이들 국가들이 과거 개별적으로 말한 내용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며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관계기관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쏘련의 과거성명서를 다시 반영시킨 것이며 하노이 당국이 지원병 파견을 요구할려는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고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신랄한 비난인 것에 불과하며, 다만 소련이 왈쏘기구 제국들로하여금 미국 비난성명서에 동의하도록 하였다는 것에 다소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과거와 달리 이번 성명서에 동의하였다는 점 등이 다른 것이다.

- 주미대사 = 만일 공산제국들(중국, 북괴 및 동구라파 제국들)이 지원병을 파견하는 경우 과거 미국은 수차에 걸쳐 성역이 없다고 언명했는데 이런 경우 미국의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

- 웅거 = 가상적인 것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지만 사태를 신중히 검토하고 어느 정도의 어떤 규모의 파병인가를 검토한 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세우게 될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기본입장이 있다.

첫째, 미국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모든 군사행동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고 절대로 필요한 군사행동 이외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

둘째, 만일 월남전쟁에 외부세력이 간섭하고 참전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어떤 국가도 미국의 반격으로부터 면할 수가 없다는 입장.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전쟁확대의 위험성이 없으며 만일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과 반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 주미대사 = 존슨대통령이 언명한 것처럼 북월맹당국이 응한다면 전쟁 축소를 위해 군대를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철수할 것인가.

- 웅거 = 월남인 자신들이 그들 자신의 일을 충분힐 돌볼 수가 있다면 그 당시의 월남사태에 감안하여 철군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경우 한국군도 그때의 사정에 따라 비율적으로 철수하게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월남정부 당국에서 한국군의 계속 주둔을 원하든가 또는 어떠한 국제적인 합의에 따라 전 외국군이 철수든가, 그중 일부철수든가가 결정될 시, 이에 따라서 처리될 것으로 생각한다.

- 주미대사 = 만일 미국군대가 철수하는 경우 군대 이외에 월남에 나가 있는 한국인 각종 기술자, 기타 계약고용인들은 계속 월남에 잔류하게 될 것인가.

- 웅거 = 한국인 기술자는 잔류할 수 있을 것이며 적어도 당분간 월남사람들은 외부원조를 필요로 하며, 미국으로서도 어떤 형식이든간에 월남부흥을 위해 돕게 될 것이므로 한국인 기술자들은 남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미국내에 월남전쟁에 대한 낙관론이 떠돌고 있지만 월남사태가 곧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며 북월맹당국내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점고해가고 있지만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할 시기는 오지 않은 것 같다.

◇ 월남자유참전국정상회담(작성일 66.10.7)

1. 회의명칭 = 월남전 지원국가의 정상회담

2. 개최지 = 필리핀 마닐라

3. 참가국가 = 한, 미, 필, 태, 호주, 뉴질랜드, 월

4. 회의목적 = 월남참전의 목적과 이념의 확인, 월남전 성격규정(월남전은 월남 만의 아님.태평양지역에있어서의 국제분쟁임), 명예스러운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전쟁을 수행할 결의를 표명, 월남전에 참가하지 않은 자유국가에 대한 대월지원 촉구 및 호소, 참전국가의 월남문제 처리를 위한 발언권 확립. 특히 아시아인의 ‘이니셔티브’ 강조(제네바회의 당사자만에 의한 처리반대), 태평양지역 방위의 불가분성 강조.

5. 회의 과제

- 월남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상조건 결정

가. 당사자

1) 1954년 제네바 협정당사국만의 월남협상 반대. 협상은 참전국이 중심이 돼야 함. 제네바 협정당사국의 참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님.

2) 베트콩은 그 자체가 당사자가 될 수 없음.

나. 협상조건

1) 월맹의 대 베트콩 군사지원 중지(I.C.C 기능 강화)

2) 남월남에 있어서 월남공화적 정부 이외의 정치권력을 인정치 않음(소위 해방전선의 해체)

다. 평화협상문제는 참전국의 공동협의를 통해서만 논의. (이하생략)

◇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방송 담화(66.10.8.주필리핀대사 보고)

- 회담이 당초 11월에서 10월말로 앞당겨진 이유와 관련,

- “이번 정상회담은 필리핀이 주창한 것이며, 처음에는 11월 하순경 개최할 생각이었으나 뉴질랜드와 호주의 선거관계로 앞당겨졌으며, 또한 10월초에 개최할 계획에 대해 어떤 나라가 자기국내 문제 때문에 곤란하다는 사정(사카린 밀수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음)을 표시하였기 때문에 10월 24∼25일로 결정된 것이다.

(주석 =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세상에 드러남)

◇ 주미대사의 번디 극동담당차관보 면담 보고(66.10.8)

- 존슨대통령의 방한시 토의할 의제와 관련,

번디씨는 첫째 마닐라 회담결과에 대한 재검토, 둘째 양국간의 공통된 문제 특히 양 대통령이 아세아문제를 어떻게 관찰하고 있는가에 문제, 셋째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박 대통령의 설명을 존슨 대통령이 듣기를 원하고 있고, 넷째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문제에 관해 매우 관심이 있으며 협의하기를 원하고 있고, 다섯째 일반환담에 들어가서는 한국의 국내정치 정세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싶다고 말함. 번디씨는 지난 번 존슨 대통령의 대구라파 및 동서양 진영 긴장완화 연설에서 지적한 독일 통일문제와 한국의 통일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부언하였음.

번디씨는 또한 유엔에서 미국은 종전과 같이 한국의 입장을 강력히 지지하여 줄 것이라고 재차 다짐했음.

◇ 7개국 회담에 대한 한국입장(66.10.17. 외무부 발, 주미대사 수신)

- 아국의 견해

의제의 명칭은 회의 성격을 표시하는 것이며 회의 진행의 방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의제를 토의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회의가 무엇 때문에 개최되느냐에 관한 점이 분명히 돼야 할 것임. 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는 참전국들이 어떻게 하면 월남전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느냐(군사적 승리)에 관하여 토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전쟁에 지쳐서 이제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평화를 희구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임. 오히려 월남에서의 침략이 종식되기까지 절대로 군사적으로 후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결의를 확고히 표명할 필요가 있고, 그럼으로써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기는 커녕 정신적인 압력을 가해야 할 것임. 그렇지 않고서는이 회의의 의의는 별로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음.

이상과 같은 회의에 임하는 정부의 태도에 비추어 정부는 비(필리핀)측의 원래의 가의제가 마치 회의를 평화모색 회의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불만히 생각하고 평화적 해결에 관한 3개의 의제를 간단히 1개항으로 간추리도록 주비대사에게 훈령한 바 있음. 또한 군사적인 정세의 검토 및 전쟁 노력의 강화 방안을 반드시 의제에 포함시키도록 훈령한 바도 있음.

- 가의제 제1항 Review of the military situation and progress of resistance to aggression and subversion in Vietam 이라는 표현은 아직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 표현이 월남군사정세의 종합적인 검토와 침략과 파괴활동을 분쇄하는 군사적인 공동노력방안을 모색하고 장차에 있을 어떠한 사태의 변동에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논의될 수 있는 의제가 설정돼야 할 것임.

- 가의제 제5항 월남전의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의제에 A, B, C 세가지는 설사 그런 것을 토의하는 일이 있을 망정 세부의제로서는 삭제하는 것이 좋을 것임.

이상과 같은 고려에서 정부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의제안을 비측에 제기하였음.

(의제안)

1) 월남의 군사 정세의 검토 및 대책

2) 월남의 복구와 안정

가) 정치 나) 경제 다) 제 과업

3) 월남 사태의 평화적 해결 방안

4) 지역적 방위와 공동 협조

이상과 같이 정부는 월남사태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의 토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만을 위해 이 회의가 소집됐다는 식의 해석에는 반대하고 있는 것임. 이와 같은 뜻에서 주최국이 제시한 회의의 가명칭 Manila summit peace conference 에서 peace를 삭제토록 훈령한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 였음. (이하 생략)

◇ 월남지원국정상회담 문제점과 우리의 견해(66.10.18.외교부 보고서)

- 한국은 현재 이상 월남에 군대를 증파할 수 있는가.

= 아직 증파에 관한 월남공화국으로부터의 요청도 없지만 설사 요청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증파는 아국의 국방상 곤란함.

파월병력 4만5천명은 우리나라 총인구 2천800만명의 622분의 1에 해당되는 바 미국의 비율과 동일함. 미국은 총인구 1억9천300만명의 622분의 1에 해당하는 31만명을 참전시키고 있음.

◇ 주미대사 보고(66.10.19)

주미대사는 번디 국무차관보를 방문하고 마닐라 정상회담 및 존슨 대통령 방한문제에 대해 대담한 결과,

마닐라 정상회담에 있어서 전쟁수행의 결의 표명과 평화적 해결방안의 두 가지 사항은 같은 비중으로 취급돼야 하며 결코 후자에 치중하지 않는 미국측 태도를 확인.

입력 : 2005.08.26 11:16 56'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508/200508260137.html

Click-eR/Resources 2006. 3. 26. 06:09

[펌] 미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322가지

1. Are you decent? 들어 가도 괜찮냐? Are you decent? I''m in a hurry.
2. Are you seeing anyone? 교제하는 사람이 있느냐?
3. Are you through? 끝났습니까?
4. Are you with me? I''m with you all the way 끝까지 당신을 지지한다.
5. Both sides agreed to disagree 양측이 이견을 인정하다.
6. Both sides refuse to fold 양측이 팽팽히 맞서 있다.
7. Come again? (pardon?) 뭐라고?
8. Compulsive eater 음식만보면 못참는 사람.cf fat farm 단식원.
9. Cool it. 진정해라,덤비지 마라.
10. Did I say something amusing? 내얘기가 그렇게 웃기냐 I''m dead serios 난 아주 심각해
11. Do I have a choice? 별수 없지 뭐?
12. Don''t get cute 까불지마.
13. Don''t get technical 어려운말 하지마라.
14. Don''t give me that 그런 소리 하지마라.
15. Visit from the stork 임신하다.
Little visitor 태아  Kid brother(sister) 동생
16. Don''t I know you. 나를 모르겠냐?
17. Don''t kid yourself. 알만한 사람이 왜이래,어림없는 소리하지 말게.
18. Don''t you know when you''re beaten 이제 떼좀 부리지 마라.
19. Do you have something to help my cold? 감기약 좀 주세요.
20. Enough is Enough 해도 너무한다,참을 만큼 참았다..
Business is business 공과 사를 구분 해야 한다.
21. Everybody has for own system 각자의 비방의 있다.
22. Everyone knows everyone else. 이웃끼리 서로의 사정을 잘알고 있다.
23. Everyone who''s anyone was there. 이름있는 사람은 다 왔어.
24. Everything I said came out wrong. 내 얘기가 모두다 잘못 전해진거야.
25. Everything''s under control.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26. Expect me when you see me. 나가봐야 알아.
27. Fair''s fair.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28. First things first. 중요한거 부터 해치우고.
What must be done,must be done. 기왕에 할일 이라면 해치워버리자.
29. Hang in there and things will turn. 힘들지만 버티어 나가고 있읍니다.
30. Have a comfort stop. 화장실 가기위해 임시 정차하겠다.
31. He always cuts it close. 그는 시간에 빠듯하게 나타난다.
32. He can drink with the best of them. 술로하면 그를 당할자가 없다.
33. He didn''t get the message(hint). 눈치가 없다.
34. He has a clean sheet. 경력(기록)이 없다.
35. He has his job,too. 그도 그의 직분이 있지.
36. He knows his place. 분수를 알다.
37. He has sticky fingers(rip off,stop-lifter). 도벽이 있는 사람이다.
38. He''s a lucky find. 진국이다.
39. He''ll pass in a crowd. 그저 그런 사람이다.
All thumb 쓸모없는 사람.
40. He''ll really feel it. 나중에 크게 후회할거다.
41. Here goes nothing. 한번 해 보는것.
Go for broke. 최선을 다해보자.
42. He''s a dollar watcher. 검소하다.
Penny pincher. 검소한 사람.
43. He''s an old women. 깐깐한 사람이다.
44. He''s a poor worker. 게으른 노동자다.
45. He''s everybody''s friend. 팔방미인이다.
46. He''s good for nothing.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47. He''s Mr.right. 여자가 본 이상형의 남자.
Good mixer.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
48. He''s not all there. 빈틈없는(똑똑한)사람이다.
It''s my day today. 운수대통.
It''s 13 friday. 재수없는 날
49. He''s out of it. 정신나간 사람이다.
50. He took the fifth. 말을하지 않고 있다.(미헌법5조:묵비권)
51. How about chejudo on me. 비용은 내가 부담할테니---가자.
52. I could ask you the same question. 내가 묻고 싶은것이 바로 그것이다.
53. I couldn''t agree more. 전적으로 동감일세.
54. I don''t have what it takes. 소질이 있어야지.
55. I feel so used. 이용당한 느낌이다.
56. I go cold all over. 소름이 끼치다.
57. I go to bed with chickens. 일찍 잠자리에 들다.
58. I''ve got you. 내가 이겼지.
59. I''ve been there before. 나도 그일을 해봤다.
60. I''ve eighteen years under my belt. 18세나 됐는데요.
61. I haven''t got all day. 서둘러라.
62. I have to change the baby. 기저귀를 바꾸다.
63. I know L.A like the back of my hand. L.A는 구석구석 다안다.
64. I''ll drink to that. 그렇다면 좋지요.
65. I''ll go macho. 남성답게 행동하겠다.
66. I''m in the middle of something. 나는 지금 어떤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67. I''m not going to let it pass. 묵과할수 없다.
68. I''m not up to that yet. 그정도도 못해.
69. I''m not what you think I am.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사람이 아니다.
70. I''m sorry I was someplace else. 다시한번 말해주시겠어요.
71. I''m telling you. 내말 명심해서 듣게나.
72. I''m up to there(I''m full enough)
73. It hit me all of a sudden.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74. It''s a beginner''s luck. 초보자의 행운.
75. It''s my honest dollar. 피땀흘려 번 돈이다.
76. It''s not over till it'' over. 끝까지 해봐야 한다.
77. It''s not what you think.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Don''t get me wrong. 오해하지마라.
I can''t stand it any longer. 더 이상 못참겠다.
78. I''ve had it. 지쳐서 진절머리 난다.
79. I want to pay a call. 화장실에 간다.
80. I want to sit sandwich. 가운데 앉을래.
81. Just keep it to yourself. 남에게 얘기하지 말라.
82. Just like that. 일고의 가치도 없다.(매정하게)
83. (It''s)Just one of those things. 흔히 있을수 있는일 아닌가?
84. Just quickly. 잠깐만 여쭤 볼께요.
85. Let it all hang out. 만사를 잊고 쉬고 싶다.
You''d better cool off. 쉬는게 좋겠다.
86. Let''s have it out. 모든걸 터놓고 얘기합시다.
heart to heart. 흉금을 털어 놓고서.
87. Let''s have one. 한잔하자.
88. Making a profit is the name of the game. 이익을 내는것이 중요하다.
89. Money doesn''t go to for. 돈이 별로 쓸모가 없다.
Money is no object ---은 문제가 아니다.
90. Money talks. 돈이면 다된다.
91. Nobody home. 정신 어디다 팔고 있냐?
92. Nothing like it anywhere. 그것 아무곳에서나 구하는게 아니다.
93. Nothing personal. 사적인 감정이 있는것이 아니다.
94. Not on your life. 천만의 말씀,말도 안된다.
95. No way(chance). 당치도 않은말 마세요(거절).
96. Now you''re talking. 이제야 말귀를 알아 듣는구나.
97. No, you didn''t. 아이고!그런일 해서는 안되는데.
98. Oh,not again. 왜 또그래,성가시게 굴지마.
99. Right on. 옳소.
100. Say when? 때가되면 말해라.
101. See one and you''re seen them all.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102. She was all heat. 마음이 그렇게 착할수가 없다.
103. Somebody picked it clean. (도둑) 누군가 싹 집어갔다(쓸어갔다).
104. Speak with an accent. 지방 사투리가 심하게 나올때.
105. It''s Greek to me. 어렵다.
106. Step outside! 나가서 한판 붙자.
107. Take it from me. 진실이니까 믿어주세요.
108. Take ten. 잠깐 쉬어가자.
Take a break 휴식.
109. Talk about rain 세상에 이런 비가올까!
110. Thank you for asking me 어쨌든 고맙다.
111. That''ll be the day 별일이야 오래살고 볼일이야.
112. That makes two of us (I agree)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113. That man is deep one 음흉한 놈이다.
114. That''s different story 그건 별개의 문제다.
115. That''s for sure 틀림없는 사실이다.
116. That''s the way it goes 인생이란 그런거야.
117. That''s what you think(77) 그건 자네 생각이고.
118. That was a close call 어휴 큰일날뻔 했다.
119. The case (is) closed 다시는 그얘기를 재론하지 맙시다.
120. The plan laid an egg (계획)일이 실패로 끝났다.
121. There I was (자신의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할때)
122. They are two of a kind 그아내에 그남편.
123. Think nothing of it 천만에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124. Those were the days 그때는 좋았지.
125. Time got you!(Time put you out) 시간이 다됐다.
126. Very funny 재밌기도 하겠다?
127. We got a case 이일은 재판에서 이길수가 있어.
128. Where do I stand 내 입장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129. Where were we? 어디까지 얘기했지?☆Where are we(길을 잃었을때)
130. Who''s kidding who? 누가 누굴 놀리는 거야?
131. Will you keep out of this? 너 좀 빠져라.
132. You did a number on me 네가 나를 놀렸겠다.(잔꾀로 남을 속일때)
133. You got that backward 너는 정반대로 알고 있구나.
134. You''re on 좋았어!
How much one for the ride? 한번 타는데 얼마?
135. I can''t get it right 잘이해가 안되는데.
136. I got back in one piece 나는 무사히 돌아왔어.
You''ll never get back in one piece 너는 절대로 무사하지 못할거야.
137. Just let your hair down 편하게 하세요.
Let one''s hair down=relax
138. Expressions of surprise
① Really? What do you know about that 뜻밖의 일인데.
② Well,how about that
139. Behind the eightball 낭패로군,진퇴양난.
140. No big deal 별거 아니다. ☆So what 그게 어쨌다는거야.
Small potatoes 대수롭지 않은것.
141. In the black 좋은 상황, In the red 좋지않은 상황.
142. It''s a piece of cake 누워서 떡먹기다.
143. She is walking on air 의기양양하다.
You seem to be especially up this morning, What happened?
얼굴이 굉장히 밝네,웬일이니?
144. Let''s go for it 한번 시도해보자.
145. That makes a difference 그것 확실히 다른데.
It doesn''t make any difference (to me) 내게는 상관 없는 일이다.
146. That will be the day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147. The real McCoy (That was the real McCoy) 진짜다.
148. He stands tall(143) 자신 만만하다.
Look at me and stand tall You have to stand tall 기죽지마.
149. He has it good 행운아다. She really has it good
150. That''s not my dish (That''s not my cup of tea:That''s not my thing)
그건 나와 거리가 멀다.
151. That''s the idea (That''s good:That''s the way to do it) 잘했어.
No, that''s not the way to do it 그렇게 하면 안돼.
152. Fireworks 격론.
Ex) I want no more of these fireworks in my courtroom.
153. Still going strong 아직도 건재하다.
154. What gives? 무슨 일이지? 왜그래?
What gives with her?:What''s the matter with her?:What''s it with her?
155. Tell you what? 이렇게 하면 어때(대화중에서).
156. A feather in his cap 영애로운것.
157. That fingers 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158. You know better than that(You know better) 알만한 사람이 왜그래.
159. Bell the cat 위험한일을 자청하다.
160. I could use a cold shower ---했으면 좋겠네.
I could use a better dictionary 더 좋은 사전이 있으면.
161. Catch you later (I''ll catch you later) 이따봐.
162. Take it easy 무리하지 말고 느긋하게 지내라.
Easy come, easy go 얻기쉬운 것은 잃기도 쉽다.
Easy touch:soft touch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
163. Beats me 단,허물없는 사이만 (I''m sorry,I don''t have any idea)
164. My kids come first 내 黴캡뺐?누가 있담.
165. Boy,that''s a beer 야! 맥주 맛이 기막히다.
166. He''s pot the ball 칼자루 쥔사람은 그사람이다.
167. I''ll keep my fingers crossed 너를 위해 기도할께.
168. What he says goes 그사람 말이라면 다통한다.
169. You''re seeing him now 네가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170. Anything goes these days 요즘은 뭐든지 허용되는 세상이니까.
171. He comes on strong(confident,brave) 그는 대담한 데가 있어.
172. Can you make it? 할수있니? 될수있니.
Do you think you can make it?
173. You made it 드디어 도착했구나.
174. Good enough 됐어요, 만족합니다.
175. I''m still stumped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176. Give me a break(Give me some relief) 좀 봐주세요.
Give me a break (Don''t lie to me) 거짓말 하지마.
177. I''ll come to that(I''ll get to that) 나중에 얘기할께.
178. Jack of all trades 뭐든지 잘하는 사람.
179. Like what? 예를들면 어떤거냐?
Give an example:Such as what?
180. That''s the spirit! 그 정신 참 훌륭해.
181. He doesn''t know the time of day 세상물정을 모른다.
182. That can wait 그것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183. This isn''t my day 재수가 좋지않다.
184. Well that''s that (It''s finished) 이제야 다끝났다.
185. Cold fish 냉정한 사람.
186. That''s a steal(What a steal) 그것 참 싸구나.
187. What do you say? 뭐 하는게 없데?
188. He wears several hats 그는 여러가지 직책을 갖고있다.
I can''t wear all the hats 나혼자 모든것을 떠 맡지못한다.
189. That''s it 그게 전부이다.①That''s all ②That''s right(correct)
191. You got it 좋아요,그렇게 하지요.
got it?:got that?=Are you with me?:Understand?
192. The jury is still out 아직은 미정이다.
193. Touch all bases 필요한 일을 완벽하게 하다.
194. He has what it takes 그는 소질이 있다.
195. He knows his way around 그는 이곳 사정을 잘 알고있다.
196. I feel like a new person 날아갈것 같은 기분이야.
197. Easy does it 천천히 조심조심 해라.
198. You''ve got it made 앞길이 훤히 트였군.
199. You have a point there 당신말도 일리가 있읍니다.
This rotten weather is really getting to me
빌어먹을 날씨, 짜증나네.
200. He''s playing hardball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You''ve got to start playing hardball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라.
201. He''s on top of things 그는 정통하다.
202. He has a good track record 성적이 좋다.
203. Way to go 잘한다 잘해.
That''s the way to go (You did a good job) 잘해낸 일이야.
204. We''ll have to cut corners 경비를 절감해야 겠다.
205. What makes him tick? 그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동기는?
206. I don''t want (to name names) 굳이 이름을 말하자면.
207. I''ll have to play it by ear 임기응변으로 해야겠어.
208. Don''t rock the boat 평지풍파를 일으키지마라.
Don''t make trouble and spoil a plan 공연히 문제 일으켜 산통 깨지마라
209. Let''s have a ball 자 마음껏 즐기자.
210. I''m telling you 내말 잘들어.
211. There you go 잘하는데.☆Here you are 여기있다.
212. Where would that leave us? 그럼 우린 어떻게 되죠?
213. Whatever it takes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했다.
214. That''s a no-no 그것은 안돼요.
215. He won''t give you the time of day 네게 기회를 주려하지 않는다.
216. He''s a pretty tough cookie 그는 만만치 않은 놈이다.
tough guy 강인한 놈 tough problem 해결하기 어려운
217. He''s picking up the pieces 그는 재기하고 있다.
218. I''m up to my ears in work 일때문에 꼼짝 못한다.
=I''m up to my eyeballs in work
I''m snowed under with work
I''m tied up at work
219. Let''s get back into the grind 지겹지만 또 일을 해야지.
220. That takes the cake 뻔뻔스러운 놈.☆He really takes the cake
221. Something''s come up 일이 생겼다.
222. You''ve come a long way 대단한 발전을 하셨군요.
223. I lost my shirt 망했다.
He would give me the shirt off his back
그는 자기간까지 빼줄 사람이다.
I lost my shirt in the stock market
거액을 날렸다.
224. He''s always getting the short end of the stick 항상 손해만 본다.
225. She has come into her own 그녀의 진가가 드러났다.
226. I''ll just come in cold 준비 없이 들어 가겠어.
227. Black and blue 멍든 자국.
228. I''m blue Why are you such a long face 왜 그렇게 울적해 보이냐?
229. I can''t tell which is which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230. What must be done,must be done 기왕에 할일이라면 해버리자.
231. There''s the door! 나가!
232. Where''s your manner? 예의 좀 차려라?
233. Where''s the john? 화장실이 어디냐?
234. How''s tricks? 뭐 재미있는일 없냐?
235. Step on the gas (hurry up)
236. I have a way with children --을 다루는데 도가 텄다.
237. She got crow''s feet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238. I see eye to eye with him 그 와 마음이 통한다.
239. I don''t see what''s good in him 그가 뭐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240. Take a break(rest) 휴식.
241. Let''s shake hands and be friend 화해합시다.
242. Go jump in the lake 빌어먹을.
243. Come off it 집어치워,그만하세요.
244. Do what you like 당신 좋은 대로 하세요.
245. Do as I tell you 내 시킨대로 해라.
246. Do your stuff 18번 해라.
247. Don''t flatter me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248. Leave it at that 그정도로 해 두세요.
249. Shows a little interest 내말에 관심좀 가져라.
250. I hope I''m not in your way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251. Take my word for it 내말 명심해라.
252. I can''t stand it any loger 더이상 참을수 없다.
253. May I trouble you with this? 이런 부탁 드려도 돼요?
254. You''d better cool off 쉬는게 좋겠다.
You''d better not worry 걱정하지마라.
255. What''s that to you? 그게 어쨌다는 거야?
256. What''s the use of all that now? 이제와서 무슨 소용있냐?
257. I was nicely taken in 멋지게 속았다.
258. I was tongue tied 말문이 막혔다.
259. He turned in at once 잠들다.cf.제출하다.
260. He turned up a sleeper 봉잡았다.
261. He called me names 내게 욕을 했다.
262. I got nothing by that 난 아무것도 아니쟎아,난뭐냐?
263. Who knows?:God knows?:Nobody knows? 누가아냐? 아무도 모른다.
264. I can''t pinpoint it:I can''t put my finger on it
뭐라고 꼬집어 얘기할수 없다.
265 Please drop the subject 그얘기 그만 합시다.
266. I''ve done it a hundred times 골백번도 더했어.
267. What makes you say so? 너 왜 그런 얘기하니.
268. What are you so cross today? 왜 인상찌푸리니?
269. Why don''t you speak your mind 마음속에 있는 말을 왜 않는거야?
270. I''m sure the work pays. 이제 그 일은 괜찮아.
271.I hope I''m not in your way. 방해가 안되면 좋겠어.
272.I wish I stayed in bed. 하는일마다 꼬일때,되는일이 없을때.
273.They say he''s fool with a capital F. 바보 중의 상 바보.
274.Just think it over. 생각 좀 해보자.
275.She stood me up. 그녀에게 바람 맞았다.
276.What a man. 사람이 어쩜.(저럴수가 있냐?).
277.Things went well. 만사가 잘 풀린다.
278. Be a tiger (You''d better go macho) 남자답게 해라.
Are you man or a mouse? 네가 남자냐?
279. Older teen-17.18. Younger teen-13.14.
280. May-December romance 젊은사람과 늙은사람의 사랑.
October-December 늙은사람끼리의 사랑.
May-June 젊은사람끼리의 사랑.
281. She is my type 남자가 본 이상형의 여자.
Champagne type 서서히 (상쾌한) 사랑.
Whisky type 진한 사랑.
Slow gin type 서서히 오르는 사랑.
Coca coke type 일회용 사랑.
282. he popped the question 나에게 구혼을 했다.
283. Grease his palm(underpay) 돈 좀 줘라.
I''ll fix you up 잘봐주면 한 턱 낼께.
284. She is in the family way:She is expecting 임신했다.
285. Kichen shower 주방용 선물. ☆Baby shower 아기용 선물.
286. I''ll kill you 격한 욕.
287. Dime a dozen 다반사,흔한일.
288. Make the bars 음주하다.
289. Sweet nothing 연인들의 밀어.
290. He''s a chamer 아주 사기꾼이다.
291. Slippery fish:Slippery eel 제비.
292. Smooth talk 사탕발림,유혹하는 말.
293. Shotgun wedding 속도위반 결혼.
294. There she goes! 저여자 갔다갔어!
295. Devil''s beverage 커피.
296. His eyes are bigger than his stomach 보는 대로 먹어 치운다.
297. I just put one out 담배를 방금 끄다.
298. I quit smoking 담배를 끊었다.
299. It''s your candy store 이게 네일이지 내일이냐?
300. This bud''s for you 버드와이져 한잔 합시다.(야구홈런)
301. Tofu 두부
302. Make no bones about it 전혀 개의치 않다.
303. Beerbelly:Butter ball:Roly-Poly 살찐 사람.
304. I wasn''t born yesterday 내가 그렇게 세상물정에 어두운줄 알아?
305. Scalper 암표상.
306. He just off the boat 이 거리가 낮설다.
307. Child molestation 아동학대죄
308. What is your poison 어떤술로 드릴까요?
eye-opener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술. A hair of the dog 해장술.
309. He''s empty upstairs 골빈놈.
310. You like it:You finish it:It has your name on it
마지막 남은 음식을 권하는말.
311. You knoe what?:I''m quitting my job 뉴스가있어,네게 얘기할게 있다.
312. You bet 정말이야.
I bet money on it 내기를 걸어도 좋을만큼 확신한다.
313. You''re too much 야!그만 웃겨라.
314. It''s a deal 찬성입니다.
315. I hold a big day 오늘 중요한일이 있다.
316. No deal 그렇게는 안되겠는데요.
317. Hang in there 참고 견뎌라.
I''ll tell him to hang it there
318. Now you''re talking 그것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Listen to this guy,now he''s talking
이 친구 말을 들어봐라,이제야 말을 듣는구나.마음에 드는 말을 한다.
319. By the grapevine 소문으로.
320. You''re right on the money:You''re correct 바로 맞추다.
321. What''s eating(biting) you? 무엇때문에 속태우느냐?
322. That''s(Advice is) the name of the game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Click-eR/Resources 2006. 3. 18. 06:02

파마 100살 볶인 머리칼 여성을 해방시켰다

‘파마’100살 “볶인 머리칼 여성을 해방시켰다”
[한겨레 2006-03-17 18:12]

[한겨레] 파마가 100살 생일을 맞이 했다.

1906년에 런던의 옥스퍼드 거리의 한 미용실에서 독일인 헤어드레서 카를 네슬레는 아내 카타리나의 머리에 수산화나트륨을 바른 뒤 12개의 놋쇠롤러에 머리를 말아, 섭씨 100도인 전기기구로 달궈 굽실굽실한 파마 머리를 선보였다. 카트리나는 두 차례나 머리카락과 머리가 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원래 파마 머리는 1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도된 적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나무 스틱에 머리를 만 뒤 뜨거운 광천에서 가져온 진흙을 듬뿍 바르고 뜨거운 태양에 바싹 말렸다. 진흙에 있는 알카리 성분이 머리를 곱슬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1938년 아놀드 에프 윌랫이 뜨거운 열을 이용하지 않고, 암모늄 등 화학약품을 이용한 파마기술을 개발해 파마를 더욱 간편하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을 메마르고 갈라지게 하는 부작용도 없어졌다. 이후 파마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현대의 가장 대중적인 머리패션으로 자라잡았다.

파마가 가장 대중적인 머리패션으로 자리잡은 것은 머리손질의 시간을 줄여주고, 행동의 자유를 줬기 때문이다. 파마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여성용 바지, 코코 샤넬의 스커트와 함께 여성해방을 촉진한 3대 패션 혁명으로 평가된다.

파마는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60~70년대 저항적인 히피문화로 파마는 남녀공통의 머리패션으로 올라섰고, 대중문화 스타들이 스타일을 선도했다. 팝스타 마돈나, 영국 축구선수 케빈 키건 등이 대표적이다. 케빈 키건의 파마 머리는 70년대 축구선수들의 선호 모델이자 남성 파마의 전형이 됐고, 데이비드 보위, 캐서린 제타 존스, 멕 라이언, 존 본 조비 등 연예계 스타들이 특유의 파마 머리로 시선을 끌었다.

1970년대에는 머리를 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연출해주는 파마가 선보였고, 1980년대에는 크고 높은 ‘버블파마'가 유행했다. 팝 그룹 바나나마라와 여가수 카일리 미노그는 촘촘한 나선모양의 파마, 크고 높게 머리 형태를 만들어주는 파마로 유행을 선도했다. 1990년대에는 마돈나 머리로 정의되는 자연스러운 파마가 유행을 했다. 가볍고 느슨한 파마가 더 우아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최근에도 ‘집시 웨이브' 등 자유로운 스타일의 파마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의 헤어드레서 마크 힐은 〈시엔엔〉과의 인터뷰에서 “슈퍼모델 지젤은 환상적이고 부드러운 웨이브 머리를 선보였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고전적인 50년대 파마 머리를 현대적으로 바꾸어서 멋진 헤어스타일을 연출하고 있다.”며 “새로운 파마 상품들이 멋쟁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데 좋은 방법으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미용실을 찾는 여성들은 시에나 밀러나 마돈나식 파마 머리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런던의 유명 미용실 토니앤가이의 존 오닐은 “파마가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디자인되고 있다”며 “집시인 보헤미안 스타일을 본떠 자유로움을 강조한 시에나 밀러의 ‘보호 트렌드’가 유행하고 있다”고 요즘 파마 스타일을 평했다. 그는 “앞으로 신기술로 다양한 파마 디자인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lick-eR/Resources 2006. 3. 14. 15:10

금고 2년이상 실형자 국립묘지 `NO'

금고 2년이상 실형자 국립묘지 `NO'
[연합뉴스 2006-03-15 13:44]
생계형 단순사고자 안장 가능

고 강창성 의원, 국립묘지 안장 부결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금고 2년 이상의 실형 선고를 받은 국가유공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춘 유공자가 과실 또는 교통사고 등 가벼운 생계형 사고를 냈다면 안장이 허용되도록 규정이 일부 완화됐다.

국가보훈처는 14일 보훈처 회의실에서 관련부처, 민간전문가 등 13명으로 구성된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의 첫 회의를 열어 안장 심의 대상과 기준을 의결했다고 15일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1월31일 이후 금고 2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원칙적으로 안장할 수 없도록 했다.

더욱이 살인과 강도, 강간, 유괴 등 반인륜적, 반사회적 파렴치범이나 누범, 상습범, 사회 안녕 질서를 훼손한 중요 범죄자,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

또 보훈처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고 하더라도 서훈이 박탈되면 유족에게 이장을 권고토록 할 계획이다.

특히 12.12사건과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 등에 연루돼 서훈이 박탈되는 신군부 인사들도 안장 대상에서 제외되며, 이들 사건으로 유죄 판결받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국립묘지에 안장되기 어렵게 됐다.

정부는 이와 관련, 14일 차관회의에서 서훈을 박탈할 대상자들을 일부 확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보훈처는 사실적으로 혼인생활을 하고 있으나 혼인신고가 없어 법률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배우자라 하더라도 국가유공자 예우.지원 법률에 따라 보상을 받거나 족보 또는 친족회 등에서 '사실혼' 배우자로 인정하면 국립묘지에 안장된 남편과 합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의사자와 의사상자로서 3급이상 장애등급 판정을 받은 사람과 교정직 또는 위험직종에 종사하는 공무원으로 직무현장에서 사망 또는 상이 3급 이상으로 사망한 경우에는 안장할 수 있다.

국위를 선양하거나 국가 및 사회 공헌자 등은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안장 여부가 결정된다.

한편 1980년 신군부에 협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4년형을 선고받아 2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던 고(故) 강창성(姜昌成) 전 의원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여부를 심의한 결과, 다른 죄목이 추가로 나와 부결됐다.

three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Click-eR/Resources 2006. 3. 14. 12:03

‘게이샤 환상’ 일본선 깨진 지 오래

‘게이샤 환상’ 일본선 깨진 지 오래
[주간조선 2006-03-15 09:32]

과거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 남성편력 자서전 쏟아지며 실망
지망생 줄어 `멸종` 위기... `게이샤의 추억`도 일본선 흥행 실패

최근 한·일 양국에서 게이샤(藝者)에 대한 영화가 동시에 상영됐다. 한국에서는 ‘게이샤의 추억’으로, 일본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인 ‘사유리’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올려졌다. 일본의 경우 세계적인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라는 기대심리로 초기에는 관객이 몰렸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왜 게이샤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영화 ‘사유리’(‘게이샤의 추억’)가 실패한 것일까? 한 일본인은 “사유리는 일본인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미국, 중국 등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했다. 또 일본인에게 ‘게이샤’라는 존재는 더 이상 한국인이나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진 게이샤의 ‘발가벗기’ 자서전은 그나마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게이샤에 대한 일말의 환상마저 무너뜨렸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아서 골든의 ‘게이샤의 추억’이 도화선이 됐다. 미국인이 쓴 게이샤에 대한 이야기가 서양인에게 신비로움을 안겨주면서 일본 문화와 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일본 출판계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게이샤 본인이 쓴 자서전 혹은 수기였다. ‘현직’ ‘전직’이란 타이틀을 달고 게이샤들이 앞다퉈 단행본을 출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TV까지 덩달아 ‘게이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게이샤는 한국의 ‘기생’과 비슷한 성격의 존재라고 보면 된다. 한국의 기생도 예전에는 글과 춤에 능숙하지 않으면 안됐다. 특히 관기(官技)의 경우 기생학교 같은 엄격한 교육기관이 있었고, 비록 상류사회 남성에게 웃음을 팔았지만 절도와 기개가 있었다.

일본의 게이샤 교육 역시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전통무용은 물론 노래, 샤미센 연주, 다도, 그림, 꽃꽂이, 걸음걸이, 교양상식 등을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았다. 기모노를 입을 때 머리에 얹는 장신구 무게가 18㎏ 이상 나갔고, 게다(나막신) 높이가 15㎝였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게이샤의 세계를 ‘가류카이’ 즉 ‘화류계’라고 불렀고, 게이샤는 예술을 상류사회에 전달하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받았다.

게이샤는 1700~180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 게이샤, 여자 게이샤로 나뉘었는데 게이샤가 여성만의 전문직업으로 정착된 것은 에도시대 이후부터였다. 이때부터 게이샤와 마이코(舞子ㆍ예비 게이샤)가 일본 여성의 패션과 문화를 리드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는 ‘가류카이’ 여성이 상류사회 남성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써 서양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여성은 집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상류사회 연회에 자주 참석할 수 있었던 게이샤가 서양문물을 접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는 연회에서 가까워진 남성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작고한 우노 전 일본수상이 한 게이샤 여성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가 버렸고,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해서 수상이 된 지 3개월 만에 사임했다는 한국의 보도는 조금 과장된 것이다. 그녀는 게이샤 교육을 받았지만 곧 그만뒀고 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했다. 그러니까 게이샤가 아니라 호스티스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가류카이 교육을 받은 정통파 게이샤는 무대가 아닌 대중 앞에 나서거나 혹은 연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서 폭로와 같은 비열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노 수상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일부 게이샤는 “함부로 게이샤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항의를 언론에 한 적이 있다. 그만큼 게이샤의 자부심은 강했다.

하지만 이제 게이샤에 관한 멋진 일화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사양길에 접어든 정도가 아니라 멸종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인의 관심이 사라진 것에서도 기인한다.


앞서 밝혔듯이 게이샤는 원칙적으로 ‘아티스트’인데 1990년대부터 그들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남성편력을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특수한 교육을 받고도 종국에는 상류사회 남성 접대로만 이어진다면 현대판 호스티스와 다른 게 뭐냐는 것이 일본 독자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게이샤 출신 여성 중 일부가 기업가, 정치인, 문화계 인사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끔 정식 결혼에 이르는 커플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게이샤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껴서 학문적인 연구까지 해보고자 실제로 ‘오키야’(게이샤 양성소)에 들어가 게이샤 수련을 받은 리자 댈비 같은 미국 여성도 있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유키구니(雪國)’를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 근대문학 작품에는 온천, 여관, 그리고 게이샤가 정해진 구도처럼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요즘 일본인은 더 이상 게이샤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아직도 전문직업인으로서 인정은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이 게이샤가 된다고 하면 모두 반대를 하는 것이 현재의 일본정서다. 따라서 옛날의 게이샤는 지금 없다.

그러다 보니 유명 온천지에서는 게이샤의 자연소멸로 아우성이다. 각 온천지마다 노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게이샤 단체가 있지만 게이샤 지망생을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시에서 지원을 해줘도 젊은 여성은 관심이 없다. 온천지역 여관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여성은 50~60대이거나 가정을 가진 40~50대 중년여성이 대부분이다.

게이샤의 멸종을 막기 위해 비록 사설이긴 하지만 ‘게이샤 대학’이라는 곳도 생겼다. 이는 가나가와현 하코네 료모토 온천지에 치아케(千景ㆍ62)라는 게이샤 출신 여성이 의욕을 가지고 세운 대학이다. 물론 다른 대학처럼 건물이나 규모가 크지는 않다. 맨션 하나를 빌려 소수의 인원만 등록받아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있다. 연령제한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하치오지(八王子)라는 지역에서는 공개적으로 게이샤 모집에 나섰다. 유흥문화를 돋우지 않고는 지역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시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게이샤 공개 모집 팸플릿을 제작했고 시내 곳곳에 배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게이샤의 본산지인 교토시의 경우도 시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정통파 게이샤가 극소수 남아 있긴 하지만 그나마 후계자가 없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여 있다. TV 드라마나 CF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는 게이샤는 일본 문화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도쿄= 유재순 자유기고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lick-eR/Resources 2006. 3. 1. 15:35

[펌] 맨발의 겐

"원폭투하에 분노하지만 일본도 잘한 것 없다"
[오마이뉴스 2005-08-12 16:21]    
[오마이뉴스 김송이/조경국 기자]
 
▲ 원폭의 처참함을 사실 그대로 전해 주는 <맨발의 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오페라,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졌다.
ⓒ2005 아름드리미디어
2차대전 종전 후 일본이 하나같이 "일본은 원폭 피해자"라고만 외칠 때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반전반핵평화 만화 <맨발의 겐>의 저자 일본인 나카자와 케이지(67)가 바로 그 주인공.

나카자와 선생은 '겐'이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전쟁과 군국주의, 인종차별로 일그러진 1945년 일본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맨발의 겐>은 전쟁에 반대하는 가족이 겪는 슬픔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빼고 더하는 것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무엇보다 가해자인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45년 원폭 투하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은 히로시마에서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다. 그도 당시 원폭으로 부친과 동생들을 잃었다. <맨발의 겐>에는 원폭 이후 나카자와 선생이 겪고, 느낀 것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특히 일본으로 건너와 온갖 수모와 멸시를 받았던 조선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의 번역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선생에겐 동갑내기 조선인 친구가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겐의 가족을 돕는 '박씨'는 바로 그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가지려했던 <맨발의 겐>이 독자들에게 선보여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나카자와 선생이 이 작품을 시작할 당시, 연재를 받아주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 전전한 끝에 1973년부터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온 지 5년,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2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카자와 선생은 일본 내 우익의 협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60년이 지났건만, 그들의 폐부가 드러나는 건 여전히 꺼림칙한 일인 걸까.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일본 사이따마에 살고 있는 나카자와씨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옮긴다.

"원폭투하 없었으면 내 삶도 달랐을 것"

 
▲ <맨발의 겐>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 선생
ⓒ2005 조경국
- <맨발의 겐>은 선생의 자전적인 일을 기록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만약,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선생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내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며 원폭에 대해 이렇게 큰 원한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 <맨발의 겐>을 그릴 당시만 해도 천황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글, 또는 원폭을 다룬 글이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원폭을 당했다. 원폭이 떨어진 날, 부친이랑 누님, 동생들은 다 타서 죽고, 그때 살아남은 모친은 그 뒤 소화 41년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치른 뒤 재장에 뼈를 받으러 갔더니, 몽땅 타버려 뼈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원폭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원폭의 위험성을 온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곧 원폭 이후 낙진으로 검은 비가 내렸던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첫 작품 <검은 비를 맞아서>(1968)를 썼다. 큰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한 뒤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을 때까지 반년이나 걸렸지만, 좋은 편집장을 만나 출판하게 됐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출판사는 당시 주로 에로틱한 내용의 책을 내고 있었다."

-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자비를 들여서라도 출판할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소년점프> 편집장이 <맨발의 겐> 연재를 약속했을 때 심정을 소회하면?
"<소년점프>의 나가노 다다스씨는 '네가 쓰고 싶은 대로 페이지 수를 줄 거고, 또 쓰고 싶은 대로 연수를 줄 테니 마음 놓고 써봐라'고 했다. 그는 '<맨발의 겐>은 <소년점프>의 양심을 걸고 연재하겠다'고 했다. 주마다 작품을 써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연재 후 <소년점프> 애독자 수가 훨씬 불어나, 결과적으로 소년잡지 가운데 제일 많은 부수를 자랑하게 됐다. 보람 있게 일한 날들이었다."

한국어판 가장 먼저 내고 싶었다

▲ 원폭의 열기를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강에서 그대로 썩어가는 시신들이 처참하다. 이 장면들도 나카자와 선생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2005 나카자와 케이지
- 여러 나라에서 번역본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의 반응은 어땠나.
"미국의 달라스 지역에서 <맨발의 겐> 애니메이션을 상영했을 때다. 어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폭탄을 만들지 않게 했을 텐데, 우리 몰래들 펜타곤이 한 일이라 우리 죄가 너무 큽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며 하염없이 울었다. 또 한번은 영국에서 만든 연극 <맨발의 겐>을 보게 됐다. 이 연극은 남자배우가 소년기에 영어판 <맨발의 겐>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만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며칠 밤을 침대 속에서 울면서 지냈다. 읽다가 울고, 눈물 닦고 또 읽다가 다시 한참을 울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연극으로 만들리라 다짐했고, 이제야 연극으로 완성했다'고 소회했다."

- 2000년에 한국어판을 낼 때는 기분이 어땠는가.
<맨발의 겐>은 어떤 만화?

<맨발의 겐>은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가 1945년 8월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을 만화로 옮긴 것이다. 열과 폭풍으로 살이 녹아 버린 사람들, 유리파편이 온몸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소녀, 파리가 온몸을 뒤덮고 있는 아들의 시신을 지키는 어머니, 길거리 마다 쌓여 있는 시체. 만화지만 원폭의 피해를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준다.

특히 전쟁을 반대했던 자신의 가족이 군국주의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불행했던 경험과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 2000년 8월 10일 한국 출간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1973년부터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돼 반전반핵 만화로 명성을 얻은 <맨발의 겐>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영화와 오페라, 애니메이션,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 외 <평화 만화 시리즈>와 <맨발의 겐은 비카동(원폭)을 잊지않는다>등 반전반핵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출간했다. / 조경국
"한국어판은 어느 번역본보다 먼저 내고 싶었다. 스태프를 시켜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번역을 의뢰하고자 했으나 맡아 주는 이가 없었다. '포기해야겠구나' 싶었을 때, 번역을 하겠다는 재일 한국인이 찾아와 너무 기뻤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져 있지 않은 때라, 한국에서의 출판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주제가 원폭이었으니. 도중에 책을 출판하지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비핵반전자들이 적극적으로 출판사의 등을 떠밀어 나올 수 있었다.

10권이 완역되던 이듬해 서울에서 뮤지컬 공연이 있어 방문했는데, 현장에서 만난 학생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만화책은 학교에 가져가면 안 되는데 계속 읽고 싶어서 가져갔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들켰거든요. 그런데 몰수는커녕 좋은 책 읽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고 책도 그냥 돌려주셨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라는. 학생 중에는 그 책을 3번이나 읽은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일본정부가 내 만화를 지원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 일본 정부에서 해외 번역을 가장 많이 지원한 만화라고 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전쟁 책임과 관련해서 천황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일본 내 우익들의 공갈을 이겨내고 신변을 조심하면서 진행한 창작 작업이었다. 이를 일본 정부가 지원해줄 리 만무하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2005 조경국
- 혹자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과 <맨발의 겐>을 비교하기도 하고, 노사카 아키유키의 <반딧불이의 무덤>을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화영화로 옮긴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와 비교하기도 한다.
"<쥐>는 저자 아트 슈피겔이 <맨발의 겐>을 읽고 쓴 책이라고 들었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내가 쓴 책이 그렇게 해서 역사의 진실을 토로하게 한 데 기쁨을 느낀다. <반딧불의 묘>도 잘 된 작품이다. 작품마다 비교한다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맛이 서로 다르고 느끼는 감도 서로 다른 게 문학이나 예술 등 작품이지 않나."

- 피폭 60년이 지났다. 소감이 있다면?
"원한은 한때라도 풀리지 않았다. 60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도 늘 그 원한에 얽매여 살고 있다. 죽어서도 이 원한을 저승까지 가져갈 거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릴 따라 다닌다. 이미 많은 피폭 1세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나로서는 피폭의 기억이 없는 2세들 역시 불안한 요소들이다. 그 참담하던 히로시마의 피폭을 다양한 형태로 보존하는데 보다 큰 힘을 써야 한다."

- 요즘의 근황, 그리고 이후의 계획이 있다면.
"요새는 눈이 멀어서 가는 선을 긋지 못한다. 선은 그림의 생명이니, 이제 만화는 그리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데 힘쓰고 있다. 과거의 히로시마를 무대로 한 <오꼬노미 핫짱>을 만들어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상영했다."

"가해자 일본 그대로 보여줘 번역 결심"
[인터뷰]<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조경국
<맨발의 겐>을 번역한 김송이씨는 194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그러나 자신은 부모님이 태어난 제주도를 고향으로 생각한다. 중학교까지는 일본 학교에서 배웠으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민족교육을 받고, 졸업 후 모교인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95년부터 <맨발의 겐> 번역을 시작했으며, 현재 일본어 통역과 번역을 하며, 오사카 긴키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 4일,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8월1일~11일) 참가차 귀국한 김씨를 만났다.

- 한국은 무슨 일로 오셨나?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 때문에 지난 4일 들어왔다. 이오덕 선생께서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인데 이오덕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인 2003년 여름 연수부터 참여했다. <맨발의 겐>을 번역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선생님의 저서 <우리말 바로쓰기>을 우연히 읽고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2003년에서야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 <맨발의 겐> 번역 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어떻게 번역을 맡게 된 건가?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0년이지만 번역은 1995년부터 시작했다. 꼭 한글로 번역해 학생들이 읽도록 하고 싶었다. 제대로 작업을 하고 싶어 습자기술에, 인쇄기까지 다 구입했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원폭에 관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본은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맨발의 겐>은 그렇지 않았다. 가해자였던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만화다. 번역을 하리라 마음을 먹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번역판이 나온 지 5년 정도 지났다. 그간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
"처음 한국에서 출간하려고 했을 때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맨발의 겐>이 담고 있는 뜻을 공감해 주었고, 출간 이후 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신영복 선생이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한국에서 <맨발의 겐>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을 때는 나카자와 선생과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광복 60주년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모님은 제주도가 고향이지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조선인이라고 놀리는 일본아이들과 싸우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달랐다. 그때만 해도 조선말, 조선고등학교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식민지 사람이라 억압을 받았지만, 내겐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우리말이 갈수록 영어나 외래어에 오염되고 남과 북의 말이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 조경국


- ⓒ 2005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