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에 "화병"난 조선일보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 아직 적어도 이념적인 지향을 내걸고 있다면 - 이날 남자들은 꽃과 선물을 여성들을 준비해 건네기도 하고, 사회주의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유럽이나 남미등지에서는 이날 남성들이 여성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를 기획하기도 한다. 또 몇몇 국가에서는 국경일이기도 하다.

원래는 여성의 인권과 정치적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꼭 그런 정치적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축제의 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전세계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게다가 올해는 토요일이니 어머니를 대신해 설겆이라도 하는 것이 "엄마 밥~" 하고 살아 온 한국 남자들이 한번쯤 생색을 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다. 하루라도 양성평등을 체험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지 않은가?


산업 혁명시민 혁명으로 인해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기존 사회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이제 집안에서 가사 노동만을 담당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고,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이 1857년 미국의 뉴욕 시에서 처음으로 폭발한다. 이때 방직,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곧 경찰에게 공격받고 해산되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이 최초로 그들의 노동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1908년 2월 28일 미국에서 여성들의 또 한번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15,000명이나 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 등을 요구하며 뉴욕 시로 행진하였다.

이후 1910년 제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영어)Clara Zetkin) 으로부터 매년 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여성의 날' 행사가 제안되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1911년 3월 19일에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이 치뤄지기로 결정된다. 1848년 3월 19일은 프러시아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 계급의 봉기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고 여성 참정권 등을 약속한 날(이 약속은 봉기의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취소되었다.)이었기에 이 날로 결정된 것이다.

(한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여성의 날 기원. 내용이 나름 충실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8%EA%B3%84_%EC%97%AC%EC%84%B1%EC%9D%98_%EB%82%A0 )


그런데......우리의 "대한민국 일등신문" 조선일보는 여성의 날 이브에 엄청난 기사를 내 보냈다.

제목마저 "선데이 서울" "일요신문"이 무릎 꿇을만 하게 선정적이다.


"'마술 걸린' 여학생 배려에 남학생은 화병난다" (기사 보기)


대학에서 생리결석을 용인해주는 "기이한 제도"가 한국에 있다고 소개를 하면서,

한학기 동안 여학생들은 결석 5번에 A도 받을 수 있는데, 남학생은 결석 5번에 F를 못 면한다는 불평이 커져가고 있다고, 서강대 정모군의 입을 빌어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서강대는 5번이 아니라 3번으로 결강 가능일수를 줄였다고. 기사에도 있지만, 아니 생리라는게 학교에서 두번 덜하라고 하면 안해지는 것인가?

일단 A을 "받을 수도"와 F를 "못 면한다"를 비교하는 인간들의 논리학으로 대학은 어찌 다니고, 기자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5번이나 수업을 빠지고도 A를 받는 여학생들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수업도 안들어와서 F를 못 면하는 남학생들은 도대체 학교를 뭐하러 다니는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도대체 조선일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사실 비싼 등록금 내놓고 학교에 못 갈 정도로 아픈 여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다른 방법을 학교에서 마련해야한다는 내용이라면 내가 이해를 좀 하겠는데,

수업에 결석하는 것을 무슨 "특권"으로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선이야말로 회사에 결근 하고 싶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욕망의 대리 만족은 혹 아닌가 되묻고 싶다.

물론 말도 안되는 기사들을 써내는 고충은 이해하지만, 그런데만 쓰라고 머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8,90년대 대학가를 통제하고 싶어했던 정권과 교육부가 대학교 출석 체크를 통해 운동권 학생들을 걸러내고자 했던 역사가, 저급한 대학교육의 질과 취업전장터화 되는 대학 문화와 맞물려, 대학교육을 "출석체크"로 학점주는 수준으로 떨어뜨린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왜 "출석 안부르냐"고 학장, 총장에게 투서하는 대학생들도 있다니 할말 다한 우리내 대학 풍경인데, 그러면 대학이 학위를 주지 말고 수료증을 주어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치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일정한 수준의 수업 참가 도장을 받아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기자 이름을 보니까, 최수현인가 하는 기자(여성기잔가? 그동안 기사를 보니 주로 조선일보에 연대동문회기사를 올리시던데)가 이 기사를 함께 쓴 것 같은데, 자기는 생리통이 없으니 남들도 견딜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생리휴가나 휴강제도는 조한혜정 교수도 기사에서 언급했지만, 말그대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제도가 아니던가?

그것이 단지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건강한 젊은 여성이면 한달에 한번씩은 피할 수 없이 "참아 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리적 보편성에 입각해서 마련한 제도이고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조선일보를 "여성의 날" 이브에 맞춰 화병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기사가 아닌가 싶다.

노동절 이브에는 또 무슨 기사를 준비하고 있을까?

전두환 취임전날, 이명박 취임전날 부르던 "용비어천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밑도 끝도 없이 그나마 "바람직한" 사회제도들에 시비는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리휴강제도는 "한국에만 있어서 이상한 제도"가 아니라, 한국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따라 배울만한 제도라는 생각은 왜 해보질 못하는지.

"여성의 날"에 맞춰, 여성 건강관련 소비재에 대한 광범위한 감세와 공공재로써 가격조정이 대기업과 고소득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왜 논의꺼리도 되지 못하는지, 여성을 애낳는 기계로 생각하는 보건복지부의 신생아 정책에 문제는 없는지를 한번쯤 되돌아 보는 그런 기사를 쓸 기자가 조선일보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 수정: 여성이 아니다 보니 생리대 부가세 면제가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것을 몰랐네요. 수정했습니다. 실제로는 감세이후 가격이 더 상승했다고도 합니다. 한국적인 시장구조에서는 부가세 감세가 답은 아닌것 같고, 공공재로써 적극적인 시장개입과 통제가 보다 더 효과적일 것도 같네요. (http://blog.naver.com/grandchyren?Redirect=Log&logNo=46097412 참조)



** 추가 **

최근 2MB 정부가 52개 생필품 목록을 만들어 가격 관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거기 보면 45번재 항목에 "위생대"가 있다. 어떻게 잡겠다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록에 보면 "바지"가 생필품에 들어가 있는데 또 "치마"는 없다. 무슨 머리로 "빈칸 채우기 놀이"를 하시는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생리대의 공식 명칭이 "위생대"였나? 네이버 한글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위생대 명. 생리대의 북한말"이라고 나오던데, 뭐 뜻이 통하니 그것은 됐고...

과외 받는 미국 대학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대학 도서관 화장실내 과외광고 (핸드폰촬영..도촬한다고 옆방?에서 신고할까봐 조마조마했다. 셔터소리때문에.. ^^)


대학생들의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다는 기사를 언제가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 대학만의 일은 아닌가보다.

미국 대학의 도서관 복사기 주변, 셔틀버스 정거장등에서 각종 "아카데믹 서비스"광고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엔 미국 대학생들, 유학생들이 함께 버거워하는 작문, 이력서, 계획서, 논문등등의 교정 서비스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로스쿨, 메디컬 스쿨, MBA등의 "입시과외"도 갈수록 많아지는 추세다. 한국도 그런 광고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국은 과외강사 모집광고도 상당한 편이니 그나마 좀 차이가 있달까?

며칠 전 도서관 화장실에 가 보니, 화장실 안쪽 문에 광고 전단 하나가 붙어있었다.
한데 그 광고는 다른 광고들과는 다른 말 그대로 "과외" 그것도 "특정 수업과외" 광고 전단이 아닌가? 
특정과목 학점을 위해 하는 과외! 

학기초, "기말 전에 도움을 구하라!"라고 협박하는 이 광고는 그 수업을 듣건 안듣건 간에, 사람들의 편안한 배변생활을 위협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뜯겨나간 연락처가 화장지 대용으로 쓰이진 않았을 테니, 광고에서 "서광"을 발견하고 "뿌듯함"을 떼어내 문을 나서는 학생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대학이 오직 학점과 취업만을 위해, 그리고 상위 "전문대학원"진학을 위해 거쳐가는 과정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가하는 씁쓸함이 치올랐다. 날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을 "환수"해야한다는 강박,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경쟁의 무한증식에 가위눌린 그들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이경숙같이 지성이나 학자적 양심과는 하등 관계없는 장사치 CEO 형 교수가 대학을 대표하고, 정치판에서 권력 쫒을 때만 "교수"로써 지성인 행세를 하는 세상이 된지도 오래다. 학생들만 탓하는 인간들, "기초학력이 떨어지네" 뭐네 해대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교수들이 결국 대학을 포기한 셈이니 그들도 이제 "사교육"시장의 도전을 받아야하는 것은 자업자득일 테다. (이점에서 보면 이제 그 "특정과목들"은 대학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 셈이기도 하다. 사교육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보따리들 싸시던가...)

하지만 그래도 대학은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며 "희망"과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내에서도 "돈되는" 과목만을 수강하고 그 속에서 과외까지 받으며 학점경쟁을 하는 것을 또 언제 조중동 같은 신문들이 받아서, "미국의 대학들"도 그러하니 우리도 대학내 특정과목 "몰입교육"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이미 "돈안되는 과"의 폐지를 해대는 미국적 모델이 한국의 상당수 대학들에 일반화되어있고, 그 돈안되는 과들은 "교양학부"라는 아이러니한 이름 아래서 서로 자리다툼하고 있는 실정이니 "기차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체념해야할까?

이제 대학에서의 희망 같은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시덥잖은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대안 같은 것은, "두잉 베스트"하시겠다는 분들께 맡겨놓고, 차라리 "대학에서의 자유"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인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율성을 지키고자 하는 시도까지 무시되어서야 하는가 의심스럽다.
대학을 보다 철저히 자본의 이해에 귀속되도록 관리 감독 하고 싶어하는 시도에 맞서,
"성적을 폐지하라!"라고 맞선 이의 외침이 그저 몽상가의 헛소리 밖에 아닐까하는 고민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대학은 적어도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탓만하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연구가 그렇고, 학문의 생산이란 다른 현실의 생산 혹은 그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것일 텐데.....

"성적을 폐지하라!" 번역글 보기 (자율평론) 



채점 압박

학생들 과제 채점의 시기가 돌아오면, 채점자로써 권위를 느껴볼 겨를도 없이 두통과 불안에 떨게된다.

내 숙제 준비도 바쁜 터에 학생들 영어 문장들을 읽고 있기도 참 벅차고, 또 학생들 과제물의 대상이 되는 책들과 논문들을 뒤지고 있자면 고작 20명 남짓 채점하는데 하루 이틀이 꼬박 걸린다.

학생으로서는 매우 부러운 시스템이고 또 바람직 한 모델이지만, 학생들의 과제에 일일이 코멘트를 적어서 결국 나의 채점 기준을 다시 학생들로 부터 검사 받아야 한다는 것은 채점자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일이다.

그래도 돌이켜 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나는 내 과제물을 선생님들이 읽기나 하는 지에 대해서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미국에서 가르치다 돌아온 한 여교수를 제외하곤 내 보고서들에 코멘트를 달아 돌려준 교수가 있었을까 싶다. 그래도 석사 논문을 쓸때는 제법 격식있는 코멘트를 받기도 했었지만. 

하여 나는 내 글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부분이 남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 상호적으로 검증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기회의 부재가 오늘날 나의 글쓰기를 상당히 압박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명분상, 학생들과 과제물을 두고 소통하는 이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것은 없다.

다만 이것이 "학점"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적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채점"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가 채점당하는 학생들로 부터 도전 받지 않기 위해서 몇줄 안되는 코멘트의 문법을 두번 세번 확인하고, 학생들의 학점이 정당한지 네번 다섯번 고려해야하고 그나마도 결국 학생들의 불만과 협상에 종종 빠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식으로 아주 좋은 소통 방식일 수 있었던 것이, "학점"과 "채점"의 압박에 놓이면서 가르치는자와 배우는자의 호혜적 가능성은 빛을 바래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