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 남성편력 자서전 쏟아지며 실망
지망생 줄어 `멸종` 위기... `게이샤의 추억`도 일본선 흥행 실패
최근 한·일 양국에서 게이샤(藝者)에 대한 영화가 동시에 상영됐다. 한국에서는 ‘게이샤의 추억’으로, 일본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인 ‘사유리’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올려졌다. 일본의 경우 세계적인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라는 기대심리로 초기에는 관객이 몰렸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왜 게이샤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영화 ‘사유리’(‘게이샤의 추억’)가 실패한 것일까? 한 일본인은 “사유리는 일본인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미국, 중국 등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했다. 또 일본인에게 ‘게이샤’라는 존재는 더 이상 한국인이나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진 게이샤의 ‘발가벗기’ 자서전은 그나마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게이샤에 대한 일말의 환상마저 무너뜨렸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아서 골든의 ‘게이샤의 추억’이 도화선이 됐다. 미국인이 쓴 게이샤에 대한 이야기가 서양인에게 신비로움을 안겨주면서 일본 문화와 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일본 출판계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게이샤 본인이 쓴 자서전 혹은 수기였다. ‘현직’ ‘전직’이란 타이틀을 달고 게이샤들이 앞다퉈 단행본을 출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TV까지 덩달아 ‘게이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게이샤는 한국의 ‘기생’과 비슷한 성격의 존재라고 보면 된다. 한국의 기생도 예전에는 글과 춤에 능숙하지 않으면 안됐다. 특히 관기(官技)의 경우 기생학교 같은 엄격한 교육기관이 있었고, 비록 상류사회 남성에게 웃음을 팔았지만 절도와 기개가 있었다.
일본의 게이샤 교육 역시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전통무용은 물론 노래, 샤미센 연주, 다도, 그림, 꽃꽂이, 걸음걸이, 교양상식 등을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았다. 기모노를 입을 때 머리에 얹는 장신구 무게가 18㎏ 이상 나갔고, 게다(나막신) 높이가 15㎝였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게이샤의 세계를 ‘가류카이’ 즉 ‘화류계’라고 불렀고, 게이샤는 예술을 상류사회에 전달하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받았다.
게이샤는 1700~180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 게이샤, 여자 게이샤로 나뉘었는데 게이샤가 여성만의 전문직업으로 정착된 것은 에도시대 이후부터였다. 이때부터 게이샤와 마이코(舞子ㆍ예비 게이샤)가 일본 여성의 패션과 문화를 리드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는 ‘가류카이’ 여성이 상류사회 남성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써 서양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여성은 집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상류사회 연회에 자주 참석할 수 있었던 게이샤가 서양문물을 접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는 연회에서 가까워진 남성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작고한 우노 전 일본수상이 한 게이샤 여성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가 버렸고,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해서 수상이 된 지 3개월 만에 사임했다는 한국의 보도는 조금 과장된 것이다. 그녀는 게이샤 교육을 받았지만 곧 그만뒀고 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했다. 그러니까 게이샤가 아니라 호스티스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가류카이 교육을 받은 정통파 게이샤는 무대가 아닌 대중 앞에 나서거나 혹은 연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서 폭로와 같은 비열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노 수상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일부 게이샤는 “함부로 게이샤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항의를 언론에 한 적이 있다. 그만큼 게이샤의 자부심은 강했다.
하지만 이제 게이샤에 관한 멋진 일화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사양길에 접어든 정도가 아니라 멸종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인의 관심이 사라진 것에서도 기인한다.
앞서 밝혔듯이 게이샤는 원칙적으로 ‘아티스트’인데 1990년대부터 그들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남성편력을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특수한 교육을 받고도 종국에는 상류사회 남성 접대로만 이어진다면 현대판 호스티스와 다른 게 뭐냐는 것이 일본 독자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게이샤 출신 여성 중 일부가 기업가, 정치인, 문화계 인사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끔 정식 결혼에 이르는 커플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게이샤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껴서 학문적인 연구까지 해보고자 실제로 ‘오키야’(게이샤 양성소)에 들어가 게이샤 수련을 받은 리자 댈비 같은 미국 여성도 있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유키구니(雪國)’를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 근대문학 작품에는 온천, 여관, 그리고 게이샤가 정해진 구도처럼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요즘 일본인은 더 이상 게이샤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아직도 전문직업인으로서 인정은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이 게이샤가 된다고 하면 모두 반대를 하는 것이 현재의 일본정서다. 따라서 옛날의 게이샤는 지금 없다.
그러다 보니 유명 온천지에서는 게이샤의 자연소멸로 아우성이다. 각 온천지마다 노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게이샤 단체가 있지만 게이샤 지망생을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시에서 지원을 해줘도 젊은 여성은 관심이 없다. 온천지역 여관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여성은 50~60대이거나 가정을 가진 40~50대 중년여성이 대부분이다.
게이샤의 멸종을 막기 위해 비록 사설이긴 하지만 ‘게이샤 대학’이라는 곳도 생겼다. 이는 가나가와현 하코네 료모토 온천지에 치아케(千景ㆍ62)라는 게이샤 출신 여성이 의욕을 가지고 세운 대학이다. 물론 다른 대학처럼 건물이나 규모가 크지는 않다. 맨션 하나를 빌려 소수의 인원만 등록받아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있다. 연령제한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하치오지(八王子)라는 지역에서는 공개적으로 게이샤 모집에 나섰다. 유흥문화를 돋우지 않고는 지역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시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게이샤 공개 모집 팸플릿을 제작했고 시내 곳곳에 배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게이샤의 본산지인 교토시의 경우도 시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정통파 게이샤가 극소수 남아 있긴 하지만 그나마 후계자가 없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여 있다. TV 드라마나 CF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는 게이샤는 일본 문화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도쿄= 유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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