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ck-eR/Resources 2006. 3. 14. 12:03

‘게이샤 환상’ 일본선 깨진 지 오래

‘게이샤 환상’ 일본선 깨진 지 오래
[주간조선 2006-03-15 09:32]

과거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 남성편력 자서전 쏟아지며 실망
지망생 줄어 `멸종` 위기... `게이샤의 추억`도 일본선 흥행 실패

최근 한·일 양국에서 게이샤(藝者)에 대한 영화가 동시에 상영됐다. 한국에서는 ‘게이샤의 추억’으로, 일본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인 ‘사유리’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올려졌다. 일본의 경우 세계적인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라는 기대심리로 초기에는 관객이 몰렸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왜 게이샤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영화 ‘사유리’(‘게이샤의 추억’)가 실패한 것일까? 한 일본인은 “사유리는 일본인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미국, 중국 등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했다. 또 일본인에게 ‘게이샤’라는 존재는 더 이상 한국인이나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진 게이샤의 ‘발가벗기’ 자서전은 그나마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게이샤에 대한 일말의 환상마저 무너뜨렸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아서 골든의 ‘게이샤의 추억’이 도화선이 됐다. 미국인이 쓴 게이샤에 대한 이야기가 서양인에게 신비로움을 안겨주면서 일본 문화와 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일본 출판계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게이샤 본인이 쓴 자서전 혹은 수기였다. ‘현직’ ‘전직’이란 타이틀을 달고 게이샤들이 앞다퉈 단행본을 출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TV까지 덩달아 ‘게이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게이샤는 한국의 ‘기생’과 비슷한 성격의 존재라고 보면 된다. 한국의 기생도 예전에는 글과 춤에 능숙하지 않으면 안됐다. 특히 관기(官技)의 경우 기생학교 같은 엄격한 교육기관이 있었고, 비록 상류사회 남성에게 웃음을 팔았지만 절도와 기개가 있었다.

일본의 게이샤 교육 역시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전통무용은 물론 노래, 샤미센 연주, 다도, 그림, 꽃꽂이, 걸음걸이, 교양상식 등을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았다. 기모노를 입을 때 머리에 얹는 장신구 무게가 18㎏ 이상 나갔고, 게다(나막신) 높이가 15㎝였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게이샤의 세계를 ‘가류카이’ 즉 ‘화류계’라고 불렀고, 게이샤는 예술을 상류사회에 전달하는 전문예술인으로 인정받았다.

게이샤는 1700~180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 게이샤, 여자 게이샤로 나뉘었는데 게이샤가 여성만의 전문직업으로 정착된 것은 에도시대 이후부터였다. 이때부터 게이샤와 마이코(舞子ㆍ예비 게이샤)가 일본 여성의 패션과 문화를 리드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는 ‘가류카이’ 여성이 상류사회 남성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써 서양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여성은 집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상류사회 연회에 자주 참석할 수 있었던 게이샤가 서양문물을 접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는 연회에서 가까워진 남성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작고한 우노 전 일본수상이 한 게이샤 여성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가 버렸고,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해서 수상이 된 지 3개월 만에 사임했다는 한국의 보도는 조금 과장된 것이다. 그녀는 게이샤 교육을 받았지만 곧 그만뒀고 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했다. 그러니까 게이샤가 아니라 호스티스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가류카이 교육을 받은 정통파 게이샤는 무대가 아닌 대중 앞에 나서거나 혹은 연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서 폭로와 같은 비열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노 수상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일부 게이샤는 “함부로 게이샤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항의를 언론에 한 적이 있다. 그만큼 게이샤의 자부심은 강했다.

하지만 이제 게이샤에 관한 멋진 일화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사양길에 접어든 정도가 아니라 멸종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인의 관심이 사라진 것에서도 기인한다.


앞서 밝혔듯이 게이샤는 원칙적으로 ‘아티스트’인데 1990년대부터 그들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남성편력을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특수한 교육을 받고도 종국에는 상류사회 남성 접대로만 이어진다면 현대판 호스티스와 다른 게 뭐냐는 것이 일본 독자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게이샤 출신 여성 중 일부가 기업가, 정치인, 문화계 인사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끔 정식 결혼에 이르는 커플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게이샤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껴서 학문적인 연구까지 해보고자 실제로 ‘오키야’(게이샤 양성소)에 들어가 게이샤 수련을 받은 리자 댈비 같은 미국 여성도 있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유키구니(雪國)’를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 근대문학 작품에는 온천, 여관, 그리고 게이샤가 정해진 구도처럼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요즘 일본인은 더 이상 게이샤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아직도 전문직업인으로서 인정은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이 게이샤가 된다고 하면 모두 반대를 하는 것이 현재의 일본정서다. 따라서 옛날의 게이샤는 지금 없다.

그러다 보니 유명 온천지에서는 게이샤의 자연소멸로 아우성이다. 각 온천지마다 노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게이샤 단체가 있지만 게이샤 지망생을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시에서 지원을 해줘도 젊은 여성은 관심이 없다. 온천지역 여관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여성은 50~60대이거나 가정을 가진 40~50대 중년여성이 대부분이다.

게이샤의 멸종을 막기 위해 비록 사설이긴 하지만 ‘게이샤 대학’이라는 곳도 생겼다. 이는 가나가와현 하코네 료모토 온천지에 치아케(千景ㆍ62)라는 게이샤 출신 여성이 의욕을 가지고 세운 대학이다. 물론 다른 대학처럼 건물이나 규모가 크지는 않다. 맨션 하나를 빌려 소수의 인원만 등록받아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있다. 연령제한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하치오지(八王子)라는 지역에서는 공개적으로 게이샤 모집에 나섰다. 유흥문화를 돋우지 않고는 지역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시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게이샤 공개 모집 팸플릿을 제작했고 시내 곳곳에 배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게이샤의 본산지인 교토시의 경우도 시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정통파 게이샤가 극소수 남아 있긴 하지만 그나마 후계자가 없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여 있다. TV 드라마나 CF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는 게이샤는 일본 문화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도쿄= 유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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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eR/Resources 2006. 3. 1. 15:35

[펌] 맨발의 겐

"원폭투하에 분노하지만 일본도 잘한 것 없다"
[오마이뉴스 2005-08-12 16:21]    
[오마이뉴스 김송이/조경국 기자]
 
▲ 원폭의 처참함을 사실 그대로 전해 주는 <맨발의 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오페라,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졌다.
ⓒ2005 아름드리미디어
2차대전 종전 후 일본이 하나같이 "일본은 원폭 피해자"라고만 외칠 때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반전반핵평화 만화 <맨발의 겐>의 저자 일본인 나카자와 케이지(67)가 바로 그 주인공.

나카자와 선생은 '겐'이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전쟁과 군국주의, 인종차별로 일그러진 1945년 일본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맨발의 겐>은 전쟁에 반대하는 가족이 겪는 슬픔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빼고 더하는 것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무엇보다 가해자인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45년 원폭 투하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은 히로시마에서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다. 그도 당시 원폭으로 부친과 동생들을 잃었다. <맨발의 겐>에는 원폭 이후 나카자와 선생이 겪고, 느낀 것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특히 일본으로 건너와 온갖 수모와 멸시를 받았던 조선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의 번역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선생에겐 동갑내기 조선인 친구가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겐의 가족을 돕는 '박씨'는 바로 그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가지려했던 <맨발의 겐>이 독자들에게 선보여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나카자와 선생이 이 작품을 시작할 당시, 연재를 받아주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 전전한 끝에 1973년부터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온 지 5년,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2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카자와 선생은 일본 내 우익의 협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60년이 지났건만, 그들의 폐부가 드러나는 건 여전히 꺼림칙한 일인 걸까.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일본 사이따마에 살고 있는 나카자와씨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옮긴다.

"원폭투하 없었으면 내 삶도 달랐을 것"

 
▲ <맨발의 겐>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 선생
ⓒ2005 조경국
- <맨발의 겐>은 선생의 자전적인 일을 기록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만약,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선생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내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며 원폭에 대해 이렇게 큰 원한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 <맨발의 겐>을 그릴 당시만 해도 천황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글, 또는 원폭을 다룬 글이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원폭을 당했다. 원폭이 떨어진 날, 부친이랑 누님, 동생들은 다 타서 죽고, 그때 살아남은 모친은 그 뒤 소화 41년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치른 뒤 재장에 뼈를 받으러 갔더니, 몽땅 타버려 뼈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원폭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원폭의 위험성을 온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곧 원폭 이후 낙진으로 검은 비가 내렸던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첫 작품 <검은 비를 맞아서>(1968)를 썼다. 큰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한 뒤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을 때까지 반년이나 걸렸지만, 좋은 편집장을 만나 출판하게 됐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출판사는 당시 주로 에로틱한 내용의 책을 내고 있었다."

-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자비를 들여서라도 출판할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소년점프> 편집장이 <맨발의 겐> 연재를 약속했을 때 심정을 소회하면?
"<소년점프>의 나가노 다다스씨는 '네가 쓰고 싶은 대로 페이지 수를 줄 거고, 또 쓰고 싶은 대로 연수를 줄 테니 마음 놓고 써봐라'고 했다. 그는 '<맨발의 겐>은 <소년점프>의 양심을 걸고 연재하겠다'고 했다. 주마다 작품을 써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연재 후 <소년점프> 애독자 수가 훨씬 불어나, 결과적으로 소년잡지 가운데 제일 많은 부수를 자랑하게 됐다. 보람 있게 일한 날들이었다."

한국어판 가장 먼저 내고 싶었다

▲ 원폭의 열기를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강에서 그대로 썩어가는 시신들이 처참하다. 이 장면들도 나카자와 선생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2005 나카자와 케이지
- 여러 나라에서 번역본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의 반응은 어땠나.
"미국의 달라스 지역에서 <맨발의 겐> 애니메이션을 상영했을 때다. 어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폭탄을 만들지 않게 했을 텐데, 우리 몰래들 펜타곤이 한 일이라 우리 죄가 너무 큽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며 하염없이 울었다. 또 한번은 영국에서 만든 연극 <맨발의 겐>을 보게 됐다. 이 연극은 남자배우가 소년기에 영어판 <맨발의 겐>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만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며칠 밤을 침대 속에서 울면서 지냈다. 읽다가 울고, 눈물 닦고 또 읽다가 다시 한참을 울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연극으로 만들리라 다짐했고, 이제야 연극으로 완성했다'고 소회했다."

- 2000년에 한국어판을 낼 때는 기분이 어땠는가.
<맨발의 겐>은 어떤 만화?

<맨발의 겐>은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가 1945년 8월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을 만화로 옮긴 것이다. 열과 폭풍으로 살이 녹아 버린 사람들, 유리파편이 온몸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소녀, 파리가 온몸을 뒤덮고 있는 아들의 시신을 지키는 어머니, 길거리 마다 쌓여 있는 시체. 만화지만 원폭의 피해를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준다.

특히 전쟁을 반대했던 자신의 가족이 군국주의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불행했던 경험과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 2000년 8월 10일 한국 출간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1973년부터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돼 반전반핵 만화로 명성을 얻은 <맨발의 겐>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영화와 오페라, 애니메이션,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 외 <평화 만화 시리즈>와 <맨발의 겐은 비카동(원폭)을 잊지않는다>등 반전반핵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출간했다. / 조경국
"한국어판은 어느 번역본보다 먼저 내고 싶었다. 스태프를 시켜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번역을 의뢰하고자 했으나 맡아 주는 이가 없었다. '포기해야겠구나' 싶었을 때, 번역을 하겠다는 재일 한국인이 찾아와 너무 기뻤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져 있지 않은 때라, 한국에서의 출판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주제가 원폭이었으니. 도중에 책을 출판하지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비핵반전자들이 적극적으로 출판사의 등을 떠밀어 나올 수 있었다.

10권이 완역되던 이듬해 서울에서 뮤지컬 공연이 있어 방문했는데, 현장에서 만난 학생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만화책은 학교에 가져가면 안 되는데 계속 읽고 싶어서 가져갔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들켰거든요. 그런데 몰수는커녕 좋은 책 읽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고 책도 그냥 돌려주셨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라는. 학생 중에는 그 책을 3번이나 읽은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일본정부가 내 만화를 지원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 일본 정부에서 해외 번역을 가장 많이 지원한 만화라고 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전쟁 책임과 관련해서 천황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일본 내 우익들의 공갈을 이겨내고 신변을 조심하면서 진행한 창작 작업이었다. 이를 일본 정부가 지원해줄 리 만무하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2005 조경국
- 혹자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과 <맨발의 겐>을 비교하기도 하고, 노사카 아키유키의 <반딧불이의 무덤>을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화영화로 옮긴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와 비교하기도 한다.
"<쥐>는 저자 아트 슈피겔이 <맨발의 겐>을 읽고 쓴 책이라고 들었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내가 쓴 책이 그렇게 해서 역사의 진실을 토로하게 한 데 기쁨을 느낀다. <반딧불의 묘>도 잘 된 작품이다. 작품마다 비교한다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맛이 서로 다르고 느끼는 감도 서로 다른 게 문학이나 예술 등 작품이지 않나."

- 피폭 60년이 지났다. 소감이 있다면?
"원한은 한때라도 풀리지 않았다. 60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도 늘 그 원한에 얽매여 살고 있다. 죽어서도 이 원한을 저승까지 가져갈 거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릴 따라 다닌다. 이미 많은 피폭 1세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나로서는 피폭의 기억이 없는 2세들 역시 불안한 요소들이다. 그 참담하던 히로시마의 피폭을 다양한 형태로 보존하는데 보다 큰 힘을 써야 한다."

- 요즘의 근황, 그리고 이후의 계획이 있다면.
"요새는 눈이 멀어서 가는 선을 긋지 못한다. 선은 그림의 생명이니, 이제 만화는 그리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데 힘쓰고 있다. 과거의 히로시마를 무대로 한 <오꼬노미 핫짱>을 만들어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상영했다."

"가해자 일본 그대로 보여줘 번역 결심"
[인터뷰]<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조경국
<맨발의 겐>을 번역한 김송이씨는 194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그러나 자신은 부모님이 태어난 제주도를 고향으로 생각한다. 중학교까지는 일본 학교에서 배웠으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민족교육을 받고, 졸업 후 모교인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95년부터 <맨발의 겐> 번역을 시작했으며, 현재 일본어 통역과 번역을 하며, 오사카 긴키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 4일,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8월1일~11일) 참가차 귀국한 김씨를 만났다.

- 한국은 무슨 일로 오셨나?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 때문에 지난 4일 들어왔다. 이오덕 선생께서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인데 이오덕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인 2003년 여름 연수부터 참여했다. <맨발의 겐>을 번역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선생님의 저서 <우리말 바로쓰기>을 우연히 읽고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2003년에서야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 <맨발의 겐> 번역 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어떻게 번역을 맡게 된 건가?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0년이지만 번역은 1995년부터 시작했다. 꼭 한글로 번역해 학생들이 읽도록 하고 싶었다. 제대로 작업을 하고 싶어 습자기술에, 인쇄기까지 다 구입했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원폭에 관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본은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맨발의 겐>은 그렇지 않았다. 가해자였던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만화다. 번역을 하리라 마음을 먹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번역판이 나온 지 5년 정도 지났다. 그간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
"처음 한국에서 출간하려고 했을 때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맨발의 겐>이 담고 있는 뜻을 공감해 주었고, 출간 이후 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신영복 선생이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한국에서 <맨발의 겐>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을 때는 나카자와 선생과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광복 60주년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모님은 제주도가 고향이지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조선인이라고 놀리는 일본아이들과 싸우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달랐다. 그때만 해도 조선말, 조선고등학교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식민지 사람이라 억압을 받았지만, 내겐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우리말이 갈수록 영어나 외래어에 오염되고 남과 북의 말이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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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eR/Resources 2006. 2. 24. 02:45

Coca Cola History..

http://www.knet.co.za/cocacola/hi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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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The story begins in Atlanta, Georgia on May 8, 1886, when a pharmacist called Dr John Smith Pemberton first mixed Coca-Cola in his back yard. The formula, which was made from carbonated water, cane sugar syrup, caffeine, extracts of Kola nuts and cola leaves, was brought to the nearby Jacobs' Pharmacy where it made its debut as a soft drink the same day, selling for only 5 cents. His bookkeeper named this drink "Coca-Cola" after the first two ingredients. And the same distinctive script he wrote it in, is the same logo they use to this day.

 

In January 1893 Coca-Cola was registered with the U.S. patent office. Later on in 1915 the Root glass company created the famous contour glass bottle for Coca-Cola in 1915.

In 1917 Coca-Cola was found to be the world's most recognized trademark with a record of 3 million Coke's sold per day. Unfortunately, John Pemberton fell ill, and did not live to see his product’s suc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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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dly, in the first year of Coke’s existance, Pemberton and his partner only made $50. Pemberton sold two-thirds of his business in 1888 to cover his losses and keep the business afloat.

He died later that year, and Mr Asa Candler, an Atlanta druggist, purchased total interest in Coca-cola for an unbelievable $2 300 in 1891. In 1891, Candler and his brother formed the Coca-Cola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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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893 Candler registered Coca-Cola as a patented trademark. He also responded to growing concerns over the dangers of cocaine by reducing the amount of coca in the drink to a trace. However, he kept some coca extract in Coca-Cola so the name would accurately describe the drink. Candler only had a patent on the name, and not the drink syrup-that is, the drink's base, containing all the ingredients minus the carbonated water. He figured that keeping the coca in his formula would legally allow the company to distinguish its drink from imitations. Other companies also produced soda drinks made with kola nut extracts. In particular, the Pepsi-Cola Company and its cola of the same name would become Coca-Cola's major competitor over the next few decades.

Candler also spent more than $11,000 on his first massive advertising campaign in 1892. The Coca-Cola logo appeared across the country, painted as a mural on walls; displayed on posters and soda fountains where the drink was served; and imprinted on widely marketed, common household items, such as calendars and drinking glasses. In addition, Candler was the first person ever to use coupons to gain customers for a product. He distributed flyers offering free soda fountain glasses of Coca-Cola to people visiting his drugstore.


In 1894 the Coca-Cola company opened its first Coke syrup production plant outside of Atlanta, in Dallas, Texas. That same year a candy store owner in Vicksburg, Mississippi, installed bottling machines and produced the first bottled Coke. It had previously been sold only at soda fountains. By 1895 the drink was sold in all U.S. states and territories.


In 1899 lawyers Benjamin Thomas and Joseph Whitehead of Chattanooga, Tennessee, bought the exclusive rights to distribute Coke syrup to bottlers throughout most of the country for only one dollar. At the time, Candler saw little profit in bottling, and was more than willing to give up that part of the business.

In 1915 the Root Glass Company created a contour glass bottle for Coke, its design based on the curvature of a coca bean. This bottle design became a Coke trademark worldwide. The same year, Candler retired from the company, passing it on to his children and moving into politics. He was elected mayor of Atlanta in 1916.

In 1919 the Candler family sold Coca-Cola to businessman Ernest Woodruff of Columbus, Georgia, for $25 million. Woodruff's son, Robert, was elected company president in 1923. Robert Woodruff was a skilled marketer, and he put more of the compancompany's resources into market research than into manufacturing Coke. Two new Coke slogans were developed under Woodruff: "The Pause that Refreshes" (1929) and "It's the Real Thing"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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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World War II (1939-1945), Woodruff also boosted Coke's popular image in the United States by pledging that his company would provide Coke to every U.S. soldier. The company did not limit itself, however, to only doing business that would increase its success in America. In the period leading up to the war, between 1930 and 1936, it had set up a division of the company in Germany, and it continued that venture during the war. It recreated its image as a German company and allowed the Germans to produce all but two, secret, Coca-Cola ingredients in their own factories.


In 1941 the German company's president, Max Keith, developed Fanta orange soda using orange flavoring and all the German-made Coke ingredients. The Coca-Cola Company's wartime efforts helped it expand its global market, often with the economic support of the U.S. government.

By the end of the war in 1945, it had established 64 overseas bottling plants. That same year the company registered a patent on Coca-Cola's popular nickname, C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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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55 Robert Woodruff retired as the Coca-Cola Company's president. Candler and Woodruff are remembered as the two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company's early growth, both for their contributions to the company and their considerable fortunes donated to the city of Atlanta. After Woodruff's departure, the company began to diversify by producing new products, acquiring new businesses, and entering new international markets.
In 1960 the Coca-Cola Company purchased the Minute Maid Corp., producer of fruit juices, and began offering Coke in cans. Between 1960 and 1963 it also launched four new soft drinks in the United States: Fanta, an orange soda; Sprite, a lemon-lime soda; Tab, a diet cola; and Fresca, a diet grapefruit-flavored soda. In 1964 the company acquired the Duncan Foods Corp. In 1967 it created the Coca-Cola Foods Division by merging its Duncan and Minute Maid operations.
In the late 1960s, Coca-Cola faced difficulties in some of its foreign markets. When the company built a bottling plant in Israel at the outset of the Arab-Israeli War, the governments of all Arab League nations banned the production and sale of Coke. A year later the company withdrew from its markets in India when that country's government requested that Coca-Cola reduce its equity in joint ventures to 40 percent. The company refused to relinquish so much control over those operations.
In 1977 Coca-Cola began packaging Coke and other drinks in two-liter plastic bottles. The popularity of these large bottles grew over time, and their sales earned the company new profits, primarily in small specialty and convenience stores. In 1982 the company introduced Diet Coke, which soon became the best-selling diet soft drink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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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in 1982 Coca-Cola purchased the motion-picture company Columbia Pictures Industries, Inc., also known as Tri-Star Pictures, for almost $700 million. Two years later, the company sold off its Columbia holdings and other media aquisitions to Sony Corporation for over $1.5 billion.
By 1984 Pepsi-Cola had gained on Coke's previous domination of the U.S. market to the point that the two had almost equal sales. In an attempt to regain market dominance, the company attempted the first-ever revision of the original Coke recipe. The American public largely rejected New Coke, and so the company quickly returned to also producing the old recipe under the name Coca-Cola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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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86 The Coca-Cola Company consolidated all of its nonfranchised U.S. bottling operations as Coca-Cola Enterprises, Inc. The new company began acquiring independent bottling companies, a venture that grew into the world's largest bottler of soft drinks by 1988. While Coca-Cola Enterprises distributes over half of all Coca-Cola products in the United States, small franchise businesses continue to bottle, can, and distribute the company's drinks worldwide.

In 1987 the Coca-Cola Company was listed in the prestigious Dow Jones Industrial Averages index of stock market performance. Its stock is traded on the New York Stock Exchange. Coca-Cola and PepsiCo products occupied nine of the top ten spots in the U.S. soft drink market in the mid-1990s. Worldwide, Coca-Cola ranked first in soft drink sales, and the company earned almost 80 percent of its profits from international s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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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의 철도 무임승차권 반납 기사에 부쳐..

"권리를 포기하다" 와 "권리를 제한하다"는 다른 것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있다는 철도 무임승차권의 법적 효력이 철도공사의 민영화로 없어졌다는 점에서 일단 민노당의 "준법정신"에는 별다른 유감이 없다.

한데 이것을 국회의원의 특권으로 몰고가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당장은 정치적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건 좀 아니다.

월급을 안 받겠다는 대학총장, 세비를 사회환원하겠다는 국회의원, 그들이야 말로 사실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청렴성의 기준이 그런 것이어서 기초단체 의원들은 돈이 없어서 무슨 의정활동이라고 할 것도 못한다. 동네 주유소 사장, 무슨 무슨 유지들이 그런 기초의회 선거에 나가는 이유는 일단 돈은 좀 챙겨놨고 말 그대로 명예를 얻기 위함이다. 그 명예가 언젠가 돈으로 다시 바뀔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시 돌아가 보자면, 국회의원이 열심히 활동한다면, 그가 가진 권리를 확대하거나 해도 문제가 안된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국회의원을 찾아 볼 수 없으니까. 반면 민노당 의원들의 경우 전국구 중심이니 오히려 전국적인 활동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 아닌가?

어쨌든 나는 과잉된 과시적 청렴주의 혹은 권리 포기주의는 문제라고 본다. 일을 하게하고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닌가?

물론 민노당이 장애인들에 대한 무임승차 확대를 언급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것도 국회의원 몇명이 무임승차 안한다고 얻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민영화된 것이라면 법적 구속력도 없을 것이고. 서로 다른 문제의 과도한 논리적 연결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추가비용을 지불하게하고 장애인을 무료로 탑승시킨다는 논리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소득세를 제외한 소비세 중심의 제도는 어떤측면에서 전면 수정이 필요한 것 아닌가? 검약 검소의 청교도적 윤리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이슈 메이킹을 해야만 했을까?
뭐 권리가 더이상 법적으로 될 수 없다니 이것도 논리상으론 말이 안되는 비판이겠지만, 그래도 묘한 딜레마가 겹쳐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Zizek! The Elvis of Cultural Theory

포스터- 지젝! 문화이론의 엘비스



A Still Picture from the Documentary @ DUKE screen society homepage.



숙제도 안한 애가 영화를 보러갔다.

지젝! 문화이론의 엘비스.

그가 문화이론의 엘비스였나? 영화를 보고난 후 내 대답. 그렇다.
적어도 그만큼 대중적 인기는 없을지언정, 아카데미는 아마도 그와 같은 사람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김용옥의 대중적 인기도 이런것일까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갔지만, 솔직히 지젝이 백배 나을 것인데, 적어도 그는 과거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터져나오면 쉼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서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가 데리다와 스피박에 대해 말하면서, Lacanian 은 단지 그들처럼 해체에 대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그마적인 권력에 대해 말하면서 대중을 움직여 가는 것이고 자기 또한 그렇다고 말할 때의 힘은, 내가 데리다를 읽으면서 답답했던 어떤 자리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내 영어가 짧아 그의 쉴새 없이 터져나오는 말들을 다 추스리지 못했다는 것인데. 사실 그것도 그에 따르면 완벽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의 자리일테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럴 때는 데리다가 편하다.)

그의 집 문 앞에 붙어있는 스탈린 포스터.. 사실 그가 왜 스탈린을 붙여놨는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기획에 대한 실패를 분명하기 하고 그 기획의-이미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폐기처분 할- 현실적 자리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집에서 밥을 안해먹기 때문인지 주방 싱크대를 옷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차곡차곡 잘 개어서 말이지. 그 정돈 상태는 꼭 군대 관물대 정리 스타일이었는데, 지젝도 군대 갔다 왔는가 보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정신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의 뒤에 마치 잘 정돈된 논리의 자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나는 둘다 어지럽다. 정신없는 놈이 정신있는 척 살려고 기끔 발버둥을 치는 것인지, 정신있는 놈이 정신 놓고 사는 것인지 모를 만큼..

그리고 그의 환상적인 독수리 타법.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사고의 흐름을 따라잡는 신묘의 경지가 정상인의 것일 수 있다니!

역시 엘비스는 개인기가 받쳐줘야 되나 보다!

그의 대표적 개념 Enjoyment 는 맑스의 Suplus Value 와 라캉주의 그리고 프로이드의 수퍼이고가 결합한 개념이란다. 맑스의 잉여가치와 라캉주의의 판타지의 동일성은 쉽게 이해가 가는데, 결국 이것이 Super Ego 로 주체 수준에서 "폴딱" 상승하는 것이 우연성과 즉자성- Spontaneity 에 대한 그의 강조-이란 점에서 논리와 예언, 믿음과 희망이 서로 몸을 섞는 것 같다.
그는 자본주의가 이미 극한의 쾌락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그 쾌락을 자본주의적으로 회수하는 이데올로기-도덕적 재전유의 고리를 끊어낸다면 Revolution without revolution 이란 정치적 기획이 가능할 것임을 역설한다. 마치 과대 소비를 부추기면서 과소비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이중논리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토피아는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금기들 훈육적 기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 출발이라는 점에서 마치 독일 이데올로기의 맑스를 연상시키는데, 그 모든 그의 논리의 명쾌함이 가져다 주는 것들 이상으로 그의 에너지와 자기 확신은 이미 그가 문화연구의 엘비스로서 스스로를 즐기고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그의 논리에 언어로 구성된 조합물이 가지는 것 이상의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DVD로 제작되서 자막이 붙으면 다시 한번 봐야겠다. 4월 말에 온다니 그때 "실물" 구경도 하고.

참.. 잊기전에 재밌는 논리 하나..
철학을 Philo + Sophy 로 구분하는 것은 익히 하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을 Psycho + Anal + ysis 로 구분하는 것은 지젝의 위트가 넘치는 듯. LOVE is Evil 이란 그의 논리도 그렇고..!!


영화완 좀 관계없지만 재밌는 것은 오늘 극장에서 보니까, 정말 이 미국 땅의 대학에서도 "그 나물에 그밥"인 청중들이 모여들더라.
이른바 Radical Theory 수업들에서 안면이 익은 대학원생들 그리고 문화이론의 초심자들-인류학과 사람들!

대학들을 튜어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업들이 가능할까? 미국적인 아카데미 스타시스템이 한국에서는 황우석으로 귀결된 상태여서 아마도 우리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




트레일러 보기: Quick Time 필요
www.zizekthemovie.com/sightsandsounds/trailer.mov
Click-eR/Livelihood 2006. 1. 28. 13:16

각 종 매는 법.

각 종 매는 법. 어렵다. 종종 추가 해야할까 보다.

넥타이 매는 법. 매주는 이가 항상 있을 거란 착각을 버리자. 매는 기술이 항상 누군가에게 있을 거란 억측을 버리자



언젠가 이렇게 한번 매 봐야지!

망각의 리듬..

자꾸 깜박거린다.
자꾸 긁적거리고.
자꾸 말문이 막히고
자꾸 헛 짓을 한다.

그리고 가끔 또렷해지고.
가끔 시원해지고
가끔 술술 나오고
가끔 제 짓을 한다.

리듬이 변하고 있고,

망각의 스타카토.
강박의 인터메쪼.

신문기사들..

너무들 하지 않은가? 물론 기사라는 것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일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신문들을 읽노라면 도대체 요즘 세상에 누가 기자이고 기자이고자 하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일단 분석이 없는 3류 소설의 난무다.
기자의 상상력이라도 볼만 하면 좋으련만,
뻔한 내러티브로 반복되는 기사들이란 최소한의 읽는 재미조차 잃게한다.

설익은 기사들로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을 도배하는 그들에게 가끔은 정말 묻고 싶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느냐고. 당신들에게 그런게 있기나 하는 거냐고.

최근들어 사람들이 연합통신과 YTN의 "보도"에 보다 끌리는 이유는,
이미 "기사"라는 형식이 그 문체적 파탄에 다다랐으며,
더이상 글을 쓰는 문필적 기자의 존재가 의미가 없음을 알리는 부고장에 다름이 아닌 듯.

하긴 어쩌면 이제 기자없는 기사의 시대가 열렸다고,
작가없는 작품의 세계마냥 새시대의 서막에 익숙해져야하는지도 모른다.

노동이 상품이냐고 묻는다면.

오마이 뉴스에 어느 공무원 노동자가 썼다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가 있었다. 내용은 CEO 형 지자체장과 기업형 지차체에 보내는 노무현 정권의 찬사가 공무원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한데 그것은 노무현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한국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라는 점에서 공무원 노동자의 비애가 있다.

사실 나부터서 공무원 노동자의 "희생"이라는게 잘 감이 안온다. 아마도 이유는 한편에서 내가 반국가적이어서 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공무"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아직까지도 그 공공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하긴 어쩌면 그 공공성은 국가주의와 부합되는 것 같기도 하나 결국 공공적 가치의 국가적 전유로 귀결되는 것일 것이기에 섯부른 기대 자체가 문제적이라고나 할 까? 다른 하나는 이른바 "공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이미 내재화하고 있는 우리내 의식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공무란 자기아닌 누군가 혹은 적어도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한 일이 될 것이므로 다시 그 자리에서 "희생"을 발굴해내는 것이 "미담"류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얼마간의 저항이 불가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공무원 노동자의 편지글에서 내가 느낀 또 다른 문제는 "서비스가 상품인가요"라는 식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나의 첫 번째 반응은--아니 그럼 서비스가 상품이 아니란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노동은 상품화 된다는 가설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은, 그러나 최소한 정치적 수사로서도 거의 무의미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도대체 왜 공무원 노동자라고 스스로를 재정의하려고 하는 것인가? 공무 서비스가 상품이 아니라면. 자신의 노동력의 상품적 가치를 전면에 대세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무원 노동자가 기업"형" 지자체에서 CEO "형" 단체장들과 교섭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이 한 발 나가면 두발 앞질러가거나 떠밀어 내는 것이 노동자가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 아로새긴 발자취가 아니었나?

분명 문제는 쉽게 단순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이른바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교섭권"들을 확보함으로서 노동조건과 고용환경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1차적 의의를 부정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단순한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서 극복되는 상황이란 남녀간(이제는 남남간 녀녀간 남녀남간 녀남녀간 남남남간 녀녀녀간등을 동시에 표기해야 정치적으로 더욱 옳바르겠지만) 연애 관계에서도 힘든 문제다. 더구나 한국사회 비공무원 국민들은 공무원에 대해 "애뜻"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놈의 CEO 타령도 지겹지만, "인간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근본주의는 이제 더이상 얻을 것도 없지 않은가? 지난한 싸움 끝에 합법화된 전교조의 현실은 노동의 상품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부재가 만들어낸 것은 또 아닐까? 학원에 가서 시험준비하라는 전교조 교사, 벙원에 가서 정기검사 받으라는 보건소 직원, 재개발 업자와 협상하라는 구청 도시계획과 직원들의 당당함도 문제적이지 않은가? 국가없는 공무원의 꿈, 자유로운 "공무노동"의 꿈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 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썼던 김남주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공무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노동의 세속화는 멈출 수 없는 역사의 기관차다.
모든 노동의 세속화가 이루어질 때 노동은 아마도 그 자체로서 소멸할 것이고.

"감동적"이야.

그러고 보면 나라는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내 감정의 언어들은 마치 갱지위에 등사된 언어들 같다고나 할까?

슬퍼. 재밌어. 웃겨. 그저그래. 뭐...

그거 참 감동적인던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이 꽃들 봐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라고 말하는 인간에게서 종종 느끼는 것 마냥 내 몸의 털들이 일어나 깃털이 되는 것 같다.
뭐랄까 내게 감동은 이를테면 언어화 될 수 없는 어떤 진정성이랄까? 마치 고통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고 믿고 싶어지는. 물론 "진정한 것"들이 항상 특별하지는 않다. 괴테와 맑스를 따라 그저 그렇게 "오직 푸르른 것은 저소나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

요즘 읽고 있는 책을 통해 다시 떠오른 마르뀌 드 사드의 소돔 120일에서도 고통은 심지어 "비명"이란 표현 속에서도 불분명한 지극히 육체적인 것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사족이지만 사드는 참 물건이다. 그 깜직함이란!) 육체적인 감각들도 무뎌지고 정신적인 감각들도 무덤덤 해진다. 어쨌든 실상 언어적인 것으로 붙잡히긴 힘든 어떤 감정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씩 몸의 기억과 반응을 언어화 시키고 싶을 때도 있는데, 발화하는 그 순간에 밀려오는 소름. 언어가 되고 나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의 공포감이 자꾸 목구멍을 가로 막고 손을 마비시킨다.

감동의 모호함에 대하여 단지 모호함을 찬양하거나 동어반복의 습관적 표현들에 만족해야만 할까?
감동은 그런데 전이되는 것일까? 다중적으로 생성되는 것일까? 당신에게 감동을 전한다는 수사는 어쨌든 한 갓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마치 이성이 그렇듯 감정도 생성의 조건과 동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할 테고, 육체의 오르가즘이 정신을 풀어 놓 듯, "감동"도 할 말을 잃은 정신이 육체를 풀어 놓기도 하는 것 일까?

그러고보니 오르가즘에 대응하는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이 있었군!
오르가즘이 몸을 정화하던가??? 어째 감동은 정화인가?

사드를 따라, "정화조"가 아니고!

Bin Laden, Come Back, Please !

September 11'09''01 中



아직 다 본 DVD는 아니지만 911에대한 11분 9초 1프레임(2001년 9월 11일을 거꾸로 연상케하는)짜리 옴니버스인 September 11'09'01 은 다양한 국적의 감독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내러티브라는 점에서 일단 흥미진진하다.

(지금까지 본 작품들 중에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이 가장 소재적으로 덜 무거운 듯.
물론 이란 감독의 작품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다룸으로서 비정한 국제 질서의 인위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마치 그 옛날 간첩선 5천만원 간첩 천만원이었던가? 하는 현상수배 전단을 보고 장난치고 또 진지하게 꿈꾸던 그날들이 떠올라 이 작품의 단순한 내러티브에 보다 더 끌리는 듯.

"돌아와요 빈라덴!"

설득하지 못하는 자의 자괴감

꼭 반드시 내가 영어로 말해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듯 하다.
자꾸만 말이 짧아지고 공감의 자리를 만들기 보다는 강압적 논리를 펼치는 버릇은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오래된 습관이다.

91년 봄, 이른바 정치적 논쟁을 통한(사실상 구색맞추기 뿐이었던) 조직적 장악에 앞장 선 이래로, 나는 줄 곳 남을 설득하는 것 보다는 내 의견을 "선언"하는 편을 택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를테면 어떤 일과 논쟁의 리더가 되는 것을 주저 해 왔다. 대학교때 학생회장을 할 때 조차도 그 자리가 내자리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일년간 고민했어야 했다.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지난한 작업에 적잖이 넌덜이도 냈었던 것 같고, 의견을 감춰야 한다는 "기술적 요구"에 대해서도 부던히도 불편해 했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나의 태도를 "차갑다"고 했고, 또 어떤이들은 "재수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냉철함"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의 경우 "말만 잘 해"라는 시니컬한 평가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어울리지 않게도 나는 개인주의자거나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늘 사람들 속에 있고 싶어하고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하고 문제들에 끼어들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결과 어제처럼 찜찜함을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느껴가며 살아오고 있다.

전공수업 Syllabus를 결정하기 위한 과 동기들 모임에서, 나는 "이책이 없다" "이 학파가 빠졌다"고 말하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 없어" 그것들이 꼭 이번학기 수업에 필요한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펼쳤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험보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또 "나는 모든 시험"에 기본적으로 반대한다는 근본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적어도 대학원생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시험으로 취직되지는 않는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내 입장은 그 어조의 단호함 때문에 상대방의 말문을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모두들 편안하게 내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내 짧은 영어에다 기본적으로 내 어조에 깔려있는 상대에 대한 "무시"가 있었겠지만 결국 나는 그 썰렁해진 분위기에 표정관리도 안되는 어정쩡함을 회피하기 위해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서야했다. "뭐 반드시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고.." "이런 의견도 있다는 젓도에서...."
이미 때는 좀 늦었고, 그래서는 안될 것이었는데도.
시간때문에 자리를 급히 정리해야되는 상황과 맞물려 서로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빠져나는 분위기란 분위기를 격양시켰던 내가 어떤 책임을 느껴야는 묘한 뒷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뭔지모를 자괴감 사이로 그간 내 말투와 어법과 대화의 기술들에 대한 반성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물론 바로 그 전날 선배 L이 내개 한차례 지적을 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남을 비판하던 내 모습에 대한 그의 스케치는 직접적이지는 않았고 뭘 말하고 싶었는지 불분명 했지만 아마도 그때문에 내 속에 물음표로 남아 있던 것이기도 했다.

모든 문제의 조건을 살펴봤을 때 아마도 내가 남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안한지 오래됐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이른바 "사회적" 관계로 부터 멀어진 이래 익숙하고 오랜 관계들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장기간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하고, 토론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같다.
다른 한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대화술의 기본 전제가 아주 희미해져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얼마간 "비사회적" 화법에 대한 나의 동경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천편일률적인 언어적 "폭발"은 그 불연소때문에 화약냄새만 진동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같다.

어쨌든 남들이 기분 나빠지는 것 만큼 최소한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될 것인데 나는 자꾸 그렇게 되가는 것 같으니 대화와 토론이 변비와 치질의 고통처럼 기억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말하고 싶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사는 인생인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인지 아마도 이런 자괴감은 이런 저런 심연과 이어져 있을 것인데..

메시아의 운명... 황우석...

대단한 사람이다.
"줄기세포"는 "안 남아" 있어도 자신을 중심으로한 "줄기 세포" 조직-황우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굳건히 남아 있으니 그는 큰일을 해낸 셈이다.

그리고 이제 그 "세포 조직"을 보호하는 일에 "원천기술" 보호 보다 더 매달려 있으니 그의 리더쉽 또한 "스너피"를 끌고 산책하는 그런 "가이드 쉽"따위에선 한참 멀어진지 오래다.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도 어차피 줄기세포 사진을 본적도, 어차피 그딴건 상관도 없이 "새 생명", "세계제일"의 환타지를 경험했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는 쉽게 사과하고 사죄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서는 안될 터였다. 광기의 소진을 위해 어쩌면 그는 치료사를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앉은뱅이를 세울수는 없어도 넋을 뺏는 신묘를 부렸으니, 이제 이 넋나간 인간들을 정상적인 인간들 속에 어울려 있게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명인지도 모른다.

모세가 바다를 못 가른다고 물러서야 하겠는가?
"이 바다가 아닌가벼" 라고 말하는 코믹이 안통하는 이상,
"너희들 중에 사탄이 끼어있다고" 성을 내는 배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적어도 그는 "선한 사마리아 인이었던 모세"가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중인 듯. 이 놀라운 "동물적 감각"은 어디서 복제했을까?

황우석 그는 어쩌면,
개인적 능력을 벗어난 주목을 기대하고,
상식에 벗어난 성공을 꿈꾸며,
대중주의에 기초하는 모든 "과학주의"의 수렁인 듯.
그리고 또 어쩌면 이번 사건은 21세기 과학지상주의 시대의 포르노그라피일런지도 모른다. "신지식인", "최고과학자"의 작위는 천편일률의 각본과 클로즈업의 조명만이 남을지도 모르니까..

국제적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것은 아니고....
사기는 크게 쳐야한다는 "대범" 컴플레스가 다시한번 여러사람의 시니컬함을 자극하고.

그나저나 "개 훌레꾼", "소 젖 안마사"등등의 오랜 홀대를 받아왔던 한국 수의학계가 마침내 과학의 별이 되나 싶더니..
"별"은 지고 그 꼬리는 길게 남는군...

잦은 소송이 만들어낸 콘테스트

연합통신의 해외 단신란을 보니 미시간에 본부를 둔 "소송 남용 감시 (lawsuit abuse watch)"라는 단체에서 해마다 가장 어이없는 상품경고문을 뽑아서 시상을 한단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한국산 전자렌지에 고양이를 집어넣어 돌렸다던가 하는 사건이 법정에 까지 가서 적절한 경고문 미비로 결국 보상비를 지불했다는 구전설화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물건을 사보면 경고문이 설명문보다 더 자세한 경우들을 종종 볼 수가 있고,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품을 사이에 두고 서로 법적을 비켜나가고 미끄러질 궁리들을 하는 셈이니 가히 21세기의 상품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이야기한 물신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듯.

그것은 예비되어 있고 너의 상상력을 통제한다!

2005년의 수상작들.



 



 



 




 


 




Following is a list of some of the best labels from the first eight contests:


A label on a baby stroller warns: “Remove child before folding
A brass fishing lure with a three-pronged hook on the end warns: “Harmful if swallowed
A popular scooter for children warns: "This product moves when used."
A nine- by three-inch bag of air used as packing material cautions: "Do not use this product as a toy, pillow, or flotation device."
A flushable toilet brush warns: "Do not use for personal hygiene."
The label on an electric hand blender promoted for use in "blending, whipping, chopping and dicing," warns: "Never remove food or other items from the blades while the product is operating."
A digital thermometer that can be used to take a person's temperature several different ways warns: "Once used rectally, the thermometer should not be used orally."
A household iron warns users: “Never iron clothes while they are being worn”
A label on a hair dryer reads, “Never use hair dryer while sleeping”
A warning on an electric drill made for carpenters cautions: “This product not intended for use as a dental drill.”
The label on a bottle of drain cleaner warns: “If you do not understand, or cannot read, all directions, cautions and warnings, do not use this product.”
A smoke detector warns: “Do not use the Silence Feature in emergency situations. It will not extinguish a fire.”
A massage chair warns: “DO NOT use massage chair without clothing... and, Never force any body part into the backrest area while the rollers are moving.”
A cardboard car sunshield that keeps sun off the dashboard warns, “Do not drive with sunshield in place”
An “Aim-n-Flame” fireplace lighter cautions, “Do not use near fire, flame or sparks”
A label on a hand-held massager advises consumers not to use “while sleeping or unconscious”
A 12-inch rack for storing compact disks warns: “Do not use as a ladder.”
A cartridge for a laser printer warns, “Do not eat toner”
A 13-inch wheel on a wheelbarrow warns: “Not intended for highway use”
A can of self-defense pepper spray warns users: “May irritate eyes”
A warning on a pair of shin guards manufactured for bicyclists says: “Shin pads cannot protect any part of the body they do not cover.”
A snowblower warns: “Do not use snowthrower on roof.”
A dishwasher carries this warning: “Do not allow children to play in the dishwasher.”
A popular manufactured fireplace log warns: “Caution - Risk of Fire”
A box of birthday cake candles says: “DO NOT use soft wax as ear plugs or for any other function that involves insertion into a body cavity.”
Click-eR/Máy vị tính 2006. 1. 7. 21:31

구글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는 이유









구글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는 이유
[매일경제 2006-01-06 18:02]






구글의 한국어 검색 결과는 형편없다.


지난 번 글에서 구글이나 엠파스 같은 검색엔진이 성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결과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구글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검색 결과가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혹자는 구글 화면이나 사용법이 국내 네티즌의 정서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부차적인 요소다. 구글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첫 번째 요소는 지난번 칼럼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분명 검색 결과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번의 구글 간담회 때 나는 미국 본사에서 나온 직원에게 “구글은 검색 결과가 형편없기 때문에 검색엔진으로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구글 직원으로서는 구글의 검색 결과가 형편없다는 말이이해되지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분명 형편없다. 마침 그때가 탤런트 장서희씨가 화제에 오르던 때라 ‘장서희 부은 얼굴’이라는 낱말로 국내 포탈과 구글의 검색 결과 차이를 설명해주고 구글이 한국어 문서 검색 결과에서 국내 포탈을 이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실제로 구글의 검색 결과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구글 검색 창에 ‘장서희 부은 얼굴’을 입력하고 ‘이미지’ 찾기를 눌러 사진을 찾아보자. 구글은 한 장의 사진(image)도 찾지 못 한다. 검색 결과 점수를 매긴다면 빵점이다.












구글은 ‘장서희 부은 얼굴’로 한 장의 사진도 찾지 못 했다.



이번에는 네이버 검색 창에 ‘장서희 부은 얼굴’을 입력하고 ‘이미지’ 아이콘을 눌러 사진을 찾아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장서희가 부은 얼굴로 나온 TV 프로그램 화면이 줄줄이 사탕처럼 보기 좋게 출력된다.












네이버에서 ‘장서희 부은 얼굴’로 검색하면 원하는 사진을 보여준다.



두 검색엔진의 검색결과를 비교해보면 더 이상 구글이 국내 포탈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구글의 검색 결과는 빵점에 가까울 정도로 형편없다. 이러니 연예뉴스 자주 보는 내 아내가 구글을 사용할 리 없고, 온라인게임 좋아하는 내 아들이 구글을 사용할 리 없다. 물론 나도 장서희 사진을 찾을 때는 구글 대신 네이버나 국내 포탈을 이용한다.


구글 검색 결과가 형편 없는 이유, 국내 사이트들이 검색을 막았기 때문
그러면 세계 최강의 검색 기술을 가졌다는 구글이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형편없는 검색 결과를 보여줄까? 구글이 영문 검색 기술만 뛰어나고 한국어 검색 능력은 뒤떨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다. 구글의 한국어 검색 능력은 분명 국내 포탈보다 뛰어나다. 구글의 검색 결과가 형편없는 이유는 국내 사이트들이 검색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한 곳은 다음 카페다. 289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장미가족의 태그교실’ 카페 하나만 뒤져도 각종 HTML, 자바스크립트 예제를 비롯한 HTML 관련 수많은 한국어 문서를 찾아낼 수 있다. 다음 카페에 이어 지식인과 블로그를 운영하는 네이버, 통(tong)과 싸이월드를 운영하는 네이트 등에 네티즌이 좋아하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사이트를 비롯하여 꽤 알려진 국내 사이트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검색로봇의 검색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웹 사이트에서 robots.txt를 이용해 검색로봇의 검색을 막을 경우 검색로봇 규약에 의해 검색로봇은 검색을 하지 않아야 한다. 검색로봇 규약을 정하고 검색로봇 거부권을 행사하는 이유는 검색로봇에 의한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막기 위함이다. 그런데 국내 대형 사이트는 검색로봇 규약을 자사의 자료 독점권 행사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정보 알맹이(content)를 축적했다고 하는 곳은 대부분 검색로봇 거부권으로 검색을 막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우저의 주소창에 ‘http://kin.naver.com/robots.txt’를 입력하고 살펴보자. 네이버 지식인의 루트 디렉토리부터 모든 자료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http://blog.naver.com/robots.txt’를 입력하고 살펴보자. 역시 네이버 블로그의 루트 디렉토리부터 모든 자료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네이버는 네이버 지식인 게시판이나 네이버 블로그에 대한 로봇의 검색을 철저하게 막고 있다.












‘http://kin.naver.com/robots.txt’를 보면 네이버 지식인의 로봇 검색을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blog.naver.com/robots.txt’를 통해 네이버 블로그도 로봇 검색을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다. 네이버의 정체가 무엇인가? 다른 사이트 게시판을 검색해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검색 사이트 아닌가?


자신은 남의 사이트 게시판과 문서를 뒤져서 그 자료를 네티즌에게 보여주면서 돈을 버는 기업이면서 정작 자신들의 게시판과 문서는 검색하지 말라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는가? 네이버가 국내 1위 포탈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도덕적 비난에 시달리는 이유는바로 이처럼 근본부터 잘못된 철학 때문이다.


다음 카페도 마찬가지다. ‘http://cafe.daum.net/robots.txt’를 입력해보면 역시 루트 디렉토리부터 검색로봇의 검색을 차단하고 있다. 카페의 경우 회원용도 있지만 공개된 게시물도 많기 때문에 로봇 검색을 막으면 안 되는데, 다음은 일괄적으로 외부 검색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역시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네티즌이 질문하고 답을 올리는 공개 게시판과 블로그조차 막고 있는 곳이 국내 1, 2위 포탈이자 검색을 대문에 내세우는 곳이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http://cafe.daum.net/robots.txt’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음 카페도 로봇 검색을 차단하고 있다.



robots.txt을 준수하는 구글의 네이버 게시물 검색은 '꽝'
표준 규약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구글이 로봇 규약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수 천 만 건의 자료가 있다는 네이버 지식인의 게시물은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이는 ‘site’ 씨낱말(keyword)로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구글 검색창에 ‘site:dal.co.kr’을 입력하면 68,600개나 되는 문서를 검색해준다. 반면 ‘site:kin.naver.com’으로 검색하면 겨우 246개만 검색된다. 개인 홈페이지의 문서도68,600개나 검색해주는 구글이 네이버 지식인의 게시물은 겨우 246개만 검색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화면을 보면 알겠지만 요약문을 제공하는 ‘site:dal.co.kr’의 검색결과와 달리 ‘site:kin.naver.com’의 검색결과는 달랑 주소만 나온다. 이는 246개마저 정상적인 경로로 검색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문서의 링크를 통해서 검색되었기 때문이다.











구글 검색창에 ‘site:dal.co.kr’을 입력하면 68,600개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구글 검색창에 ‘site:kin.naver.com’을 입력하면 246개의 검색결과만 나온다



이번에는 구글 검색창에 ‘블로그 site:dal.co.kr’을 입력해보았다. 내 개인 홈페이지에서만 16,900개나 되는 검색결과를 찾았다. 반면 ‘블로그 site:kin.naver.com’으로 검색하면 딱 한 개만 나온다.











구글 검색창에 ‘블로그 site:dal.co.kr’을 입력하면 16,900개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구글 검색창에 ‘블로그 site:kin.naver.com’을 입력하면 딱 1개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살펴본 것처럼 구글은 개인 홈페이지인 ‘dal.co.kr’에서만 6만 건이 넘는 문서를 검색해주는데, 네이버 지식인의 게시물은 겨우 300개 미만으로 검색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네이버 지식인의 대문을 통해 들어가 검색한 것이 아니라 웹문서에 링크 된 주소에 의해 검색된 결과에 불과하다. 만약 구글이 robots.txt를 무시하고 검색했다면 수 백 만 건의 검색 결과가 표시되어야 할 것이다.


robots.txt를 막지 않고 싸우는 외국과 막고 싸우는 국내 포탈
외국 사이트는 어떨까? 구글이 인수한 세계 최대 블로그 사이트라는 블로거닷컴도 검색을 막고 있을까? ‘http://www.blogger.com/robots.txt’를 입력해 블로거닷컴의 로봇규약을 살펴봤다. 블로거닷컴은 회원의 개인정보나 덧글을 단 사람의 이메일주소 등이 노출되는 ‘http://www.blogger.com/profile-find.g’와 ‘http://www.blogger.com/comment.g’ 두 곳만 막고 나머지는 검색을 허락하고 있다.











회원 신상정보와 이메일이 포함되는 덧글 관련 내용만 로봇 검색을 막고 있는 블로거닷컴



때문에 구글 검색창에서 ‘blog site:blogger.com’으로 검색해보면 886,000개의 검색결과를 보여주며, ‘site:blogger.com’으로는 747만 건의 검색결과를 보여준다. 야후(www.yahoo.com)에서도 "blogger.com"으로 검색할 경우 약 2780만 건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보여준다.











'blog site:blogger.com’의 검색결과는 886,000개다.



지난 번 데니스 황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 인터뷰 한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직 저희는 차단된 DB에 대해서는 가져올 수 없고...[줄임] 저희는 정보를 항상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려다 보니까, 유료였던 것들을 무료로 제공하는 경향이 있어요. 키홀(구글맵에 붙은 인공위성 사진 서비스), 피카사(포토 관리 프로그램)...유료였는데 저희가 가져다가 무료로, 혹은 반값으로 제공하죠. [줄임] 렉시스넥시스(LexisNexis)를 3만원 내고 본다. 왜? 수집해 주니까. 그럼 우리가 수집하면 공짜로 보여줄 수 있잖아.”- 유진닷컴(http://www.youzin.com/blog/archives/000355.html)



차단된 DB에 대해서는 정보를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에 유료인 정보를 인수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곳이 구글이다. 실제로 구글은 블로거닷컴, 피카사, 키홀을 비롯한 많은 기업을 사서 그들 기업이 가진 정보를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덕분에 과거에는 유료였던 위성사진을 이제는 무료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공개API까지 제공해 구글의 자료를 누구나 자유롭게 가공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구글 지도를 이용한 하우징맵이나 지오블로거와 같은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게시물의 검색 허용을 당연히 허용할 뿐만 아니라 공개 API까지 제공하며 자료 활용을 돕는 외국 사이트와 네티즌이 올린 자료들마저도 막는 국내 검색 포탈의 철학적, 도덕적 차이는 너무 크다.


한국적인 기술력이 고작 robots.txt로 검색로봇 막는 것?
그런데도 국내 포탈 관계자나 경영진은 언론에 종종 “우리들은 한국적 기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글이 들어와도 무섭지 않다”고 자신감을 표출한다. 그 한국적 기술력이 고작 robots.txt로 구글의 검색로봇을 막고, 네티즌으로 하여금 다른 곳에 있는 자료를 퍼오게 해서 자사 DB(Database)서버에 쌓는 것인가? 그것이 한국적 특성에 맞게 개발한 기술력이고 자신감의 원천인가?


이런 자세로는 개방성을 추구하는 인터넷 문화 흐름에 역행하기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기술력이 위축될 뿐이다. 현재 국내 검색 포탈의 검색 능력은 구글이나 야후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태다. 국내 검색 사이트의 웹문서 검색능력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룰 것인데, 일단 결론만 말하자면 국내 검색 사이트의 웹문서 검색 능력은 몇 년 전 상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국내 포탈 사이트는 자사 서버 내의 DB 검색에 매달리고 있으며 그마저도 수 많은 인력이 편집해서 보여주고 있다.


서버 내의 자료는 누가 만든 것인가? 네티즌들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여기저기 유료 무료 사이트에 올라온 고급 정보들을 펌질해서 올린 자료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한국적인 기술력이고 구글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면 제 손으로 자기 눈 가리기 아닌가?


결국 싸움터는 웹 전체가 될 것이다
네이버 직원이 말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볼 때 구글이 한국 지사를 설립하고 수 백 명의 인력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구글이 네이버나 다음을 이길 방법은 없다. 국내 사이트가 robots.txt로 구글 검색로봇의 검색을 막고 구글이 robots.txt를 준수하는 한, 가까운 시일 안에 구글이 검색엔진으로 한국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자료가 네이버 지식인과 네이버 블로그에만 쌓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주처럼 광활한 웹의 세계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한 네이버나 다음에 웹의 모든 자료가 쌓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미 고급자료는 점차 개인 블로그에 축적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네티즌도 원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포탈의 그늘에서 벗어나 더 넓은 웹의 세계로 향할 것이며 그 날은 곧 다가올 것이다. 결국 현재의 편법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검색로봇을 막고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는 국내 포탈은 도덕적 자신감 결여와 기술투자 부족의 칼날에 의해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런 상처를 입지 않고 장기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지금이라도 공정하게 경쟁하며 기술 축적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구글의 검색 결과가 형편 없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라, 구글의 검색 결과가 형편 없는 이유에 대해 부끄러워 하며 다가올 전면전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최종 싸움터는 네이버 사이트 안이 아닌 웹 전체가 될 것이며, 싸움의 승패 역시 웹 검색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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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태의 color=#9b6100>'디지털 보감'


김중태문화원(www.dal.co.kr)을 통해 국내 IT역사를 집대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필자는 IT 컬럼니스트이자 강사로 활동 중이다. 여러 매체에 각종 컬럼을 연재하고 다수의 IT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IT 비즈니스, 시맨틱웹, 블로그, 웹표준과 같은 신기술을 주제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Click-eR/Máy vị tính 2006. 1. 7. 20:51

한/영 변환키가 작동 안할때 | 잡지tip 따라잡기

http://blog.naver.com/kyd77s/150000398609

인터넷을 사용하다 보면 종종 ‘한/영’ 변환키가 작동하지 않아 당황할 때가 있다. 계속 변환 키를 눌러도 작동하지 않거나 ‘새로 고침’을 눌러도 변환되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창을 닫고 다시 열거나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아보자.

손쉽게 한/영 변환 키를 작동시키는 방법은 키보드의 ‘Alt’ 키를 눌러보는 것이다. ‘Alt’ 키는 한/영 변환 ‘잠금 기능’을 갖고 있는데 사용자들이 문자 입력도중 이것을 실수로 눌러 한·영 변환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영 변환이 안될 때는 가장 먼저 키보드의 ‘Alt’ 키를 누르고 다시 한번 문자 입력을 시도해본다.

한/영 변환 키를 작동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간단하게 인터넷 주소창을 한차례 클릭한 후 다시 한/영 변환 키를 눌러보는 것이다. 그래도 되지 않을 경우 인터넷 도구모음의 ‘도구’→‘인터넷 옵션’을 선택한다. ‘인터넷 옵션’ 창이 뜨면 다른 부분은 손대지 말고 ‘확인’ 또는 ‘취소’ 버튼을 한번 눌러주고 이후에 다시 한번 문자를 입력해 본다.

이밖에 인터넷 도구모음의 ‘파일’→‘새로 만들기’→‘창’을 차례로 선택해 (단축키 ‘Ctrl’+‘N’) 새 창을 만들어 다시 문자 입력을 시도해도 된다.

이런 응급처치법 외에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레지스트리를 수정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시작’→‘실행’→‘Regedit’를 실행해서

[HKEY_LOCAL_MACHINE\SYSTEM\CurrentControlSet\Control\Keyboard Layouts]를 선택한다. 이 하위 항목을 살펴보면 00000412 와 E0010412가 있다. 각각의 항목 안(우측 창)의 Layout File의 값이 KBDKOR.DLL이 아닌 KBDUS.DLL 등의 다른 파일이름으로 씌여 있는 것은 KBDKOR.DLL로 고쳐주면 된다.
2006. 1. 4. 23:01

진찰(診察)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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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ed Images of Duke(Dec.,2005)

지우기는 그렇고 조각 맞추기도 힘들고...
나머지 캠퍼스들의 단면들...

Duke Garden 입구에 있는 오피스. 까페도 있다는데 들어가보진 않았고. 가끔 Bazzar도 여는 것 같던데 관심이 없었고...않았고 없었고 하지만 주차패스를 구입하지 않은 내가 운좋에 앞길에 차를 대고 최단시간에 West Campus 에 이르는 길목에 있어서 항상 지나치는 곳.


겨울이어서 썰렁하나 동네 웨딩촬영의 주요 무대. 신기한 것은 신부와 사진사는 많이 봤는데 신랑은 본 적이 없다는. 세상일 알다가도 모를일이니 결혼식전에 같이 사진 찍는게 부담스러운 것인지 나름대로 결혼식 그 자체로 "공동 사진 촬영"을 남겨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왜 찍는지도 더 궁금해 질때가 있더군.


2005년 3월에 인터뷰 하러 왔을때 잠자리를 제공해줬던 친절한 이스라엘 여인께서 말씀하시길, 하루종일 인터뷰 하다가 잠깐 쉴 때 자기는 여기를 걸었노라고 했었다. 그때 사실 나는 그만한 여유도 정신도 없었다.
어쨌든 나중에 와보니 좋긴 하더군. 바쁠땐 이 곳이 나오면 과에 다 왔다는 안도감이 더 생기지만!



East Campus에 있는 무슨 홀(오디토리엄이던가?)인데 어쨌든 West Campus의 상징이 Chapel 이라면 East에는 저 건물이 있다. 두크는 원래 이 East Campus가 본산이란다. "망해가는(?)" 기독교 학교였던 것을 담배재벌이시고 아마도 "신실하셨을" Duke Family가 20세기 초에 인수 하셨다고. "가문의 영광"스러운 흔적은 곳곳에 "세종대왕"마냥 들어서 있는 동상들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참 양쪽은 다 학부생 기숙사이고, 그 사이사이의 East Campus에는 주로 인문학계열의 학과들이 몰려있다. 기숙사와 도서관과 학과들이 "등붙이고"있는 세팅이 가족적이어서 서쪽 캠퍼스보다는 다들 첫인상에 푸근하게 느끼는 듯. 하지만, 두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시는 분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이 동쪽 캠퍼스는 대학본부에서 셔틀로 오가야 할 만큼 떨어져 있는 관계로 지정학적인 마이너리티의 공간으로 인식된단다. 실제로 모든 대학들이 그렇듯 이른바 돈되는 학과들은 그들만의 왕국을 갖기마련이라서 이곳에 기숙사와 함께 있을리 만무하다.
어패가 있지만 영광스럽게도 "인류학과"도 조만간 이 곳으로 이주해서 다른 "동료들(문학, 역사등)"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Perkins Library 가는 길. 지금은 레노베이션 중이다. 저 건물 반대편(사진사가 있는 곳 쪽)에 인류학과가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경이 되는 건물은 심리학과 사회학과등이 있는데, 1층에 인류학과 대학원생 라운지와 오피스들이 있다.


이른바 Perkins Project 라고 불리는 도서관 개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Cafeteria 다. 이름은 아주 장황한 "블라블라 von 블라블라 홀"인데 학생들은 대개 저 안에서 상행위를 하고 있는 Mad Hatters 라는 커피집을 대신 부른다.
저 꼭 대기에 달려있는 망토입고 창들고 책읽고 있는 묘한 설정의 남정네 모델이 두크의 상징인 "Blue Devil"이다.

Duke Chapel

2005년 8월 9일 랄리더램공항에 내렸을 때 애써 익숙함을 가장했었드랬다. 지난 3월에 온적이 있으니 더더욱. 그래도 그때와 달리 이번엔 "입성"이었는데도....
비행기의 엔진이 잦아들며 공회전 하는 통에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의 보따리는 현실속에 진공포장 되었던 듯....

긴 여정이 될 것이다. "the World of Homelessness"와 "Uncertainty of Life"가 버무려질...


어찌어찌 한 학기가 지났고, 여전한 낯설음과 불편함은 엷게 덟힌 익숨함 밖으로 얼굴과 발가락을 내놓고 있다.

정면에서 본 Duke Chapel

Bryan Center 쪽에서 본 채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제군들은??

Kaleidoscope speaks... 2006. 1. 2. 17:28

Becoming!

생성..
시작과 끝. 의지적 기표의 뒤엉킴.
의지로 점철된 삶의 주름들이
각인되고 펼쳐지다.

가자! 2006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