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상품이냐고 묻는다면.

오마이 뉴스에 어느 공무원 노동자가 썼다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가 있었다. 내용은 CEO 형 지자체장과 기업형 지차체에 보내는 노무현 정권의 찬사가 공무원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한데 그것은 노무현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한국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라는 점에서 공무원 노동자의 비애가 있다.

사실 나부터서 공무원 노동자의 "희생"이라는게 잘 감이 안온다. 아마도 이유는 한편에서 내가 반국가적이어서 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공무"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아직까지도 그 공공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하긴 어쩌면 그 공공성은 국가주의와 부합되는 것 같기도 하나 결국 공공적 가치의 국가적 전유로 귀결되는 것일 것이기에 섯부른 기대 자체가 문제적이라고나 할 까? 다른 하나는 이른바 "공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이미 내재화하고 있는 우리내 의식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공무란 자기아닌 누군가 혹은 적어도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한 일이 될 것이므로 다시 그 자리에서 "희생"을 발굴해내는 것이 "미담"류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얼마간의 저항이 불가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공무원 노동자의 편지글에서 내가 느낀 또 다른 문제는 "서비스가 상품인가요"라는 식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나의 첫 번째 반응은--아니 그럼 서비스가 상품이 아니란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노동은 상품화 된다는 가설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은, 그러나 최소한 정치적 수사로서도 거의 무의미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도대체 왜 공무원 노동자라고 스스로를 재정의하려고 하는 것인가? 공무 서비스가 상품이 아니라면. 자신의 노동력의 상품적 가치를 전면에 대세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무원 노동자가 기업"형" 지자체에서 CEO "형" 단체장들과 교섭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이 한 발 나가면 두발 앞질러가거나 떠밀어 내는 것이 노동자가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 아로새긴 발자취가 아니었나?

분명 문제는 쉽게 단순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이른바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교섭권"들을 확보함으로서 노동조건과 고용환경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1차적 의의를 부정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단순한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서 극복되는 상황이란 남녀간(이제는 남남간 녀녀간 남녀남간 녀남녀간 남남남간 녀녀녀간등을 동시에 표기해야 정치적으로 더욱 옳바르겠지만) 연애 관계에서도 힘든 문제다. 더구나 한국사회 비공무원 국민들은 공무원에 대해 "애뜻"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놈의 CEO 타령도 지겹지만, "인간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근본주의는 이제 더이상 얻을 것도 없지 않은가? 지난한 싸움 끝에 합법화된 전교조의 현실은 노동의 상품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부재가 만들어낸 것은 또 아닐까? 학원에 가서 시험준비하라는 전교조 교사, 벙원에 가서 정기검사 받으라는 보건소 직원, 재개발 업자와 협상하라는 구청 도시계획과 직원들의 당당함도 문제적이지 않은가? 국가없는 공무원의 꿈, 자유로운 "공무노동"의 꿈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 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썼던 김남주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공무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노동의 세속화는 멈출 수 없는 역사의 기관차다.
모든 노동의 세속화가 이루어질 때 노동은 아마도 그 자체로서 소멸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