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 압박

학생들 과제 채점의 시기가 돌아오면, 채점자로써 권위를 느껴볼 겨를도 없이 두통과 불안에 떨게된다.

내 숙제 준비도 바쁜 터에 학생들 영어 문장들을 읽고 있기도 참 벅차고, 또 학생들 과제물의 대상이 되는 책들과 논문들을 뒤지고 있자면 고작 20명 남짓 채점하는데 하루 이틀이 꼬박 걸린다.

학생으로서는 매우 부러운 시스템이고 또 바람직 한 모델이지만, 학생들의 과제에 일일이 코멘트를 적어서 결국 나의 채점 기준을 다시 학생들로 부터 검사 받아야 한다는 것은 채점자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일이다.

그래도 돌이켜 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나는 내 과제물을 선생님들이 읽기나 하는 지에 대해서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미국에서 가르치다 돌아온 한 여교수를 제외하곤 내 보고서들에 코멘트를 달아 돌려준 교수가 있었을까 싶다. 그래도 석사 논문을 쓸때는 제법 격식있는 코멘트를 받기도 했었지만. 

하여 나는 내 글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부분이 남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 상호적으로 검증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기회의 부재가 오늘날 나의 글쓰기를 상당히 압박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명분상, 학생들과 과제물을 두고 소통하는 이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것은 없다.

다만 이것이 "학점"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적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채점"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가 채점당하는 학생들로 부터 도전 받지 않기 위해서 몇줄 안되는 코멘트의 문법을 두번 세번 확인하고, 학생들의 학점이 정당한지 네번 다섯번 고려해야하고 그나마도 결국 학생들의 불만과 협상에 종종 빠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식으로 아주 좋은 소통 방식일 수 있었던 것이, "학점"과 "채점"의 압박에 놓이면서 가르치는자와 배우는자의 호혜적 가능성은 빛을 바래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