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tivo Maestro - Toni Negri

머리가 복잡할 때, 머리를 밀어버릴 수는 없으니,
컴퓨터를 갈아 엎어 버리는 것도 한 해결책이다.

산뜻하게 리셋된 화면이 "날 채워줘" 라고 유혹하는데,
이번엔 "천천히"라고 답 할 참이다.

컴퓨터를 갈아 엎고 나니 한가지 오래된 문제가 해결 되었다.
곰플레이어 대신 내가 개발 초창기 부터 써오던 KMPlayer 를 대신 설치했는데 (어언 1년만에 정식 업데이트도 되었다), 곰플레이어에서는 재생이 안되던 Antonio Negri 에 관한 다큐멘터리 A Revolt That Never Ends 가 플레이가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OGG 포멧으로 BitTorrent 를 통해 유통되고 있는데, 정품 DVD를 구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이소스가 그나마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도 포르노 그라피나 상업영화 파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소스가 없어 다운 받는데 몇날 며칠을 온라인으로 기다려야 했던 기억이 있다.

문제는 그렇게 어렵게 구한 동영상이 정작 곰플레이어에서는 재생이 안되고 에러 메시지만 표시하니 그동안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 다운 받았을 때 다른 플레이어로 재생이 되었던 기억이 또렸한데, 별의 별 코덱을 다 설치해 봐도 재생이 안되니 하드드라이브 한구석에 처박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시 오픈 소스로 개발 중인 KMPlayer 가 해답이었다.
Ubuntu 가 조금만 더 힘내면 이젠 다음에 컴퓨터를 내 머리 대신 밀어버릴 땐 리눅스로 깔 계획이다.

혹시나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구한 이들을 위해 재생 불가에 대한 내 경험을 알려주자면,
잘은 모르겠으나 곰플레이어를 제거하고 KMplayer 를 설치한 경우에도 똑같이 에러가 났다.
아마도 곰플레이가 설치되면서 시스템 레지스트리를 변화 시켜버리거나,
동영상 코덱의 일부와 재생기 인식구조를 "근본적으로" 꼬이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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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A revolt that never ends


이 동영상을 구한 건 대학원 입학 첫해에 청강(수강이 아니라)했던 Contemporary Italian Thoughts 의 강의에서Michael Hardt 가 소개한 후 였다. 당나귀 밖에 써본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BitTorrent 를 써보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벌써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렸는데, 어쨌든 마이클도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친절히 알려줬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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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의 한장면: 반세계화 시위장에서 나란히 행진하고 있는 "토니"와 "마이클"-저 점퍼는 요즘도 입고 다니던데..^^


네그리에 대한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대한 다큐로써도 특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네그리를 무기징역에 처하면서 이탈리아 법원과 언론이 네그리에게 주었던 작위 "Cattivo Maestro" 에 대한 이야기가 큰 의미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이 작품만큼 내가 왜 "까띠보 마에스트로"란 필명을 주로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소스는 아직까지 못 찾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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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tivo Meastro 란 죄명으로 죽었던 최초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였다. 한국에도 수많은 "까띠보 마에스트로"가 있었다.
네그리는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당수에 대한 납치 살해 교사혐의를 받았었는데,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교수 사찰을 시작한 한국사회니....
70년대 이탈리아 혹은 80년대 한국으로의 회기가 임박한 세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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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네그리의 "거부 정치 Politics of Refusal" 에 대한 개인사적 회고.

내가 어렸을 적 농부였던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백킬로를 짊어지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모를 것이야."
그렇게 무거운 자루들을 당신 어깨에 짊어 지고  하루종일 일하는 것은,
당신의 허리를 부러트리고,
당신의 삶을 망가트립니다.

이러한 노동에 대한 그 (할아버지)의 거부가 그의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게 하고,
그 노동을 변화시켰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만약 사람들이 (주어진 바대로)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자본주의적 통제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