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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31 "태안" 기름 제거 자원봉사에 대한 "불편한 심기" 2
글
Kaleidoscope speaks.../to Hopping Dummies
2007. 12. 31. 19:13
"태안" 기름 제거 자원봉사에 대한 "불편한 심기"
께름직해도 어쩔 수 없다. "말만 앞선다"거나 "뭐 너는 뭘 했는데" "어쩌자고?" 등등의 익숙한 반문들이 이미 귓가에 미리 와 윙윙거리지만, 요즘 인터넷 신문에서 계속 보게되는 이른바 "태안 자원봉사 러쉬"기사를 읽다보면 내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기가 쉽지가 않다.
최근 기사를 보니, 태안에 몰려드는 자원봉사들로 인해 숙박할 곳이 남아 나질 않는 모양이고, 자원봉사를 "조직"하는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들에는 주말 "자원봉사 예약" 문의가 쇄도하고 정원이 가득차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다. 한국민 드디어 OECD "상위권" 수준의 "성숙한" 국민 교양의식을 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었고, 자연을 "벗"하며 살아온 위대한 "한민족"의 저력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니할 수 없다.
진정 한국인의 "환경의식"이 이처럼 고양된 때가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산 속에 백숙집 차리기 경쟁하며 "재산권"을 주장하고, 야생동물 체액 빨러 해외원정까지 마다않던 그런 "낡은" 이미지를 단방에 씻어내는 국가적 "이벤트"이자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슬기"를 보여주는 쾌거가 아닐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이승만의 식목일 제정 (아이러니하게 한국전쟁 바로 한해 전이었던 1949년), 박정희의 "자연보호헌장" 제정(이것도 아이러니하게 시바스리갈 권총파티 1년전이었던 1978년. 그 파티는 알려지다 시피 "우리" 대통령 당선자 이병박씨가 성공신화를 써가던 현대건설의 아산만 간척 사업을 "축하"하던 뒤풀이었다) 그리고 세련된 CEO 문국현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환경보호가 자본 이윤증식에 도움을 준다는 "선구안"을 가졌던, 생리대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날개를 달줄 알았던, 하여 70억 사재를 선거에 "몰빵"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까지가 이제서야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편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했으니(그것도 제헌절 제외보다 1년이나 일찍 ! 고로 자연-환경은 법 앞에 꿀린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오늘날 대중적 환경의식의 "결정적" 고양을 외면한 대가로 정치적 몰락과 대선패배를 부여안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고생들까지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거역"했으니 노동 일수 늘려주는 조치로 구시대적 구애를 자본에 하고 있었던 "바보 노무현 정부"는 역시 퇴출이 운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새로운 "환경지킴이의 날"을 만들어도 쉬원찮을 판에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 "태안 자원봉사"가 한국에서 환경운동의 "결정적" 경계선을 대중의 정치의식 내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새만금 개발 사업에 침묵하던 사람들, "서해 똥물"이 바다냐며 동해에서 제주도에서만 짜가 "카리브의 낭만"을 찾던 사람들에게 이 "느닷없는" 환경지킴이로의 자기 정체화가 내용없는 명찰을 가슴에 다는 것으로 끝나게되고 결국 그 명찰에는 "국토사랑"이라는 이승만이래 지속된 민족주의적 환경론이 아로새겨질 것 같다는 우려를 낳는다. "온국민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는 어떤 강박이 "국토사랑"으로 제한된 어떤 논리가 이 "자원봉사"에 묻어나 보인다.
물론 그래서 바다를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일련의 활동의 실질적, 혹은 선/후행 봉사논리여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삼성과 정부에 책임을 묻는 논리가 "봉사"에 파묻히는 상황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재결합의 장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민들이 어떻게 지켜낸(관리해 온) 서해바다던가? 안면도, 부안으로 이어지는 투쟁이 지역이기주의로 매도당하던 역사는 이제 끝날 것인가?
일련의 보도를 읽다가 드는 생각은 도대체 태안 주민들의 분노와 절규의 정치적 공간이 안보인다는 것이다. 서해바다가 삶의 터전인 이들의 목소리는 정작 없고, 봉사자들의 영웅적 미담들만 넘쳐난다. 혹시 줄서서 "안절부절"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봉사자"들의 인도주의, 환경주의가 태안 주민들의 분노를 순식간에 어떤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인도주의적 "봉사"가 원유누출 사고를 "천재지변"과 비슷한 것으로 그러니까 자본주의 이윤추구와 국가 관리 시스템의 붕괴를 문자적 의미의 "불행"으로 탈바꿈 시켜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자원 봉사"에 대한 감격어린 기사들 행간에 새롭다기 보다는 진부한 논리(국토사랑, 자본주의적 교양등등)가 새로운 대상(환경)을 찾아 새련되게 작동하다고 여겨진다. 벌써 태안의 숙박업계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때아닌 소득증대"가 어민들의 "좌절"과 분리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정부나 삼성에 교통비나 하루 일당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자신의 소중한 주말 휴식을 자본가의 피해보상액을 줄여주거나,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기꺼이" 사용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대목에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대상화된 환경주의의 교차점들이 놓여 있고, 이승만 이래 환경주의를 포섭하려했던 지난한 정치적 기획의 일정한 성과가 그 위에 표출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한국민의 위대한 "환경 의식"에 열광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이다.
"계열사 직원"들까지 열심히 "방제"작업에 참여하는 삼성그룹의 이미지 한편에, 분노와 절규로 그 작업 참여를 거부하는 어선들 (http://stock.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7121113334930519&type=1&TVEC)을 단순 병치해 놓고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진부한 시선"의 작동을 이번 "자원봉사" 열광이 바꿔 내지는 못할 것 같아 보이고 그것이 이른바 "순수한" 환경주의의 대중적 경계로 아로새겨질 것 같은 기우를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렇다! 나는 적어도 삼성을 위해 국가주의를 위해서는 기름때를 내 옷에 묻히고 싶지 않다.
자가용으로 "기름" 써가며 서해까지 달려와 기름 묻은 차 세차 걱정하고, 합성세제로 기름때 지울 걱정을 기꺼이 하는 "봉사"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기름도 안나오는 나라에서 기름을 펑펑써대는 중형차들엔 그리도 열광들 하시는가? 이명박이 기름값 내려준다고 열광하는 저열함은 무엇인가? 왜 위험하게 해상수송을 선택(고집)하는 자본과 정부에 분노하지 않는가? 남북 송유관, 대륙 송유관 연결등은 왜 항상 "스캔달"정도로만 한국정치에 등장하는가?
무엇보다 왜 기름을 바다에 쏟을지도 모르는 우리내 에너지 환경에는 스스로 성찰하지 못하느냔 말이다.
억지로 뙤약볕에 아카시아 나무들을 심으러 동원 되었던 사람들과의 차이가 이젠 "자원봉사"의 이름 밖에 없어서야 쓸것인가하는 생각이 얼굴에 기름때 묻은 "해맑은 얼굴"위로 내 "불편한 심기"를 조장한다.
최근 기사를 보니, 태안에 몰려드는 자원봉사들로 인해 숙박할 곳이 남아 나질 않는 모양이고, 자원봉사를 "조직"하는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들에는 주말 "자원봉사 예약" 문의가 쇄도하고 정원이 가득차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다. 한국민 드디어 OECD "상위권" 수준의 "성숙한" 국민 교양의식을 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었고, 자연을 "벗"하며 살아온 위대한 "한민족"의 저력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니할 수 없다.
진정 한국인의 "환경의식"이 이처럼 고양된 때가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산 속에 백숙집 차리기 경쟁하며 "재산권"을 주장하고, 야생동물 체액 빨러 해외원정까지 마다않던 그런 "낡은" 이미지를 단방에 씻어내는 국가적 "이벤트"이자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슬기"를 보여주는 쾌거가 아닐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이승만의 식목일 제정 (아이러니하게 한국전쟁 바로 한해 전이었던 1949년), 박정희의 "자연보호헌장" 제정(이것도 아이러니하게 시바스리갈 권총파티 1년전이었던 1978년. 그 파티는 알려지다 시피 "우리" 대통령 당선자 이병박씨가 성공신화를 써가던 현대건설의 아산만 간척 사업을 "축하"하던 뒤풀이었다) 그리고 세련된 CEO 문국현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환경보호가 자본 이윤증식에 도움을 준다는 "선구안"을 가졌던, 생리대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날개를 달줄 알았던, 하여 70억 사재를 선거에 "몰빵"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까지가 이제서야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편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했으니(그것도 제헌절 제외보다 1년이나 일찍 ! 고로 자연-환경은 법 앞에 꿀린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오늘날 대중적 환경의식의 "결정적" 고양을 외면한 대가로 정치적 몰락과 대선패배를 부여안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고생들까지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거역"했으니 노동 일수 늘려주는 조치로 구시대적 구애를 자본에 하고 있었던 "바보 노무현 정부"는 역시 퇴출이 운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새로운 "환경지킴이의 날"을 만들어도 쉬원찮을 판에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 "태안 자원봉사"가 한국에서 환경운동의 "결정적" 경계선을 대중의 정치의식 내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새만금 개발 사업에 침묵하던 사람들, "서해 똥물"이 바다냐며 동해에서 제주도에서만 짜가 "카리브의 낭만"을 찾던 사람들에게 이 "느닷없는" 환경지킴이로의 자기 정체화가 내용없는 명찰을 가슴에 다는 것으로 끝나게되고 결국 그 명찰에는 "국토사랑"이라는 이승만이래 지속된 민족주의적 환경론이 아로새겨질 것 같다는 우려를 낳는다. "온국민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는 어떤 강박이 "국토사랑"으로 제한된 어떤 논리가 이 "자원봉사"에 묻어나 보인다.
물론 그래서 바다를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일련의 활동의 실질적, 혹은 선/후행 봉사논리여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삼성과 정부에 책임을 묻는 논리가 "봉사"에 파묻히는 상황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재결합의 장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민들이 어떻게 지켜낸(관리해 온) 서해바다던가? 안면도, 부안으로 이어지는 투쟁이 지역이기주의로 매도당하던 역사는 이제 끝날 것인가?
일련의 보도를 읽다가 드는 생각은 도대체 태안 주민들의 분노와 절규의 정치적 공간이 안보인다는 것이다. 서해바다가 삶의 터전인 이들의 목소리는 정작 없고, 봉사자들의 영웅적 미담들만 넘쳐난다. 혹시 줄서서 "안절부절"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봉사자"들의 인도주의, 환경주의가 태안 주민들의 분노를 순식간에 어떤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인도주의적 "봉사"가 원유누출 사고를 "천재지변"과 비슷한 것으로 그러니까 자본주의 이윤추구와 국가 관리 시스템의 붕괴를 문자적 의미의 "불행"으로 탈바꿈 시켜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자원 봉사"에 대한 감격어린 기사들 행간에 새롭다기 보다는 진부한 논리(국토사랑, 자본주의적 교양등등)가 새로운 대상(환경)을 찾아 새련되게 작동하다고 여겨진다. 벌써 태안의 숙박업계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때아닌 소득증대"가 어민들의 "좌절"과 분리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정부나 삼성에 교통비나 하루 일당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자신의 소중한 주말 휴식을 자본가의 피해보상액을 줄여주거나,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기꺼이" 사용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대목에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대상화된 환경주의의 교차점들이 놓여 있고, 이승만 이래 환경주의를 포섭하려했던 지난한 정치적 기획의 일정한 성과가 그 위에 표출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한국민의 위대한 "환경 의식"에 열광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이다.
"계열사 직원"들까지 열심히 "방제"작업에 참여하는 삼성그룹의 이미지 한편에, 분노와 절규로 그 작업 참여를 거부하는 어선들 (http://stock.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7121113334930519&type=1&TVEC)을 단순 병치해 놓고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진부한 시선"의 작동을 이번 "자원봉사" 열광이 바꿔 내지는 못할 것 같아 보이고 그것이 이른바 "순수한" 환경주의의 대중적 경계로 아로새겨질 것 같은 기우를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렇다! 나는 적어도 삼성을 위해 국가주의를 위해서는 기름때를 내 옷에 묻히고 싶지 않다.
자가용으로 "기름" 써가며 서해까지 달려와 기름 묻은 차 세차 걱정하고, 합성세제로 기름때 지울 걱정을 기꺼이 하는 "봉사"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기름도 안나오는 나라에서 기름을 펑펑써대는 중형차들엔 그리도 열광들 하시는가? 이명박이 기름값 내려준다고 열광하는 저열함은 무엇인가? 왜 위험하게 해상수송을 선택(고집)하는 자본과 정부에 분노하지 않는가? 남북 송유관, 대륙 송유관 연결등은 왜 항상 "스캔달"정도로만 한국정치에 등장하는가?
무엇보다 왜 기름을 바다에 쏟을지도 모르는 우리내 에너지 환경에는 스스로 성찰하지 못하느냔 말이다.
억지로 뙤약볕에 아카시아 나무들을 심으러 동원 되었던 사람들과의 차이가 이젠 "자원봉사"의 이름 밖에 없어서야 쓸것인가하는 생각이 얼굴에 기름때 묻은 "해맑은 얼굴"위로 내 "불편한 심기"를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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