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에 대한 단상 + [뉴스메이커] ](16)공청협② 학생운동권 ‘코어’ 세상 밖으로

갑자기 이 기사를 찾게 된 이유는 라틴아메리카 순방을 하고 돌아 온 부시를 생각하다가, 부시 아버지 방한에 맞춰서 새로 등장했던 신무기 "부시탄"이 떠올라서 였다. 사실 공식 명칭은 그것이 아닐 텐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부시탄은 SY-44 (아래 사진의 노란통) 와 같은 개인용 발사기에서 발사되는 4연발(6연발은 아니었는데. 가물가물)-정확히는 한번에 4개의 최루탄이 한꺼번에 발사되는, 최루탄이다.
이 최루탄이 부시탄으로 명명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 부시의 방한 반대 시위에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당시 인구에 회자 되었던 이유는 이른바 가투 전선에서 "전투조"들을 공포에 떨게했던 신 진압 무기였고, 많은 이들이 이 변종 최루탄의 등장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SY-44 는 말 그대로 직격탄으로 맞으면 상당한데 나도 발에 맞았을 때(그 전경은 아스팔트위에 미끄러지듯 조준해서 발사했었다. 머리 안 맞춰줘서 다행이다) 한동안 파스를 바르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한열은 이 직격탄에 희생되었다는게 정설이고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이 두개골 함몰, 실명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사과탄은 주로 "백골단"으로 불리웠던 사복 체포조들이 사용했던 최루탄인데, 대개의 경우엔 평화시위중 몸싸움 와중에서 사용되거나, 최루탄 발사기 사용이 용이치 않은 건물 진입시에 사용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이 백골단의 위용은 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영안실을 드릴로 뚫고 들어온 사진 한장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과탄을 맞으면, 안경쓴 사람은 안경알이 깨질 정도고 실제로 많은 대학생들이 그로 인한 실명의 공포속에서 가투를 해야했었다. 냄새보다도 파편의 공포가 심했던 최루탄이라 할 수 있다.

지랄탄은 주로 공포의 검은차 "페퍼포그"에서 주로 발사 되는데, 포물선을 그리고 땅에 떨어진 이후 마치 폭죽처럼 정신없이 최루가스를 뿜어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건 한번 노출되면 위액을 쏟을 정도의 고통을 주고, 초심자들은 대개 대열에서 낙오하게되서 대부분은 "딸려가게" 된다. 하지만 학생운동 전투조의 신화라는 "오월대" "녹두대"의 싸움꾼들에게는 이것도 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랄탄은 일단 땅에 떨어진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가스 분사를 시작하는데, 그전에 이 지랄탄을 집어서 전투경찰 편으로 던져 버리거나. 가스 분출구를 지면으로 향하게 하거나, 발로 분출구를 눌러서 분사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법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부시탄은 상황이 달랐다. 지랄탄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참" 전투조들이 발사된 탄을 손으로 붙잡을 즈음 사과탄과 비슷한 방식으로 폭발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버지 부시 방한 반대 투쟁시 파편에 손을 다친 사람들이 상당했다. 지랄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시위대에 나름 시간을 벌어주어 "매트릭스 신공"을 부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었다면, 부시탄은 직격 조준에 가까운 발사 방식에다가 날아오는 속도도 상당히 빠르고, 발사후 자체 폭발 시간도 대체로 짧은 편이어서 시위대열을 속수 무책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가격이 비싸서 그랬는지, 아니면 "최루탄 부상"에 대한 사회적 압박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학생운동의 대중동원력이 사그라들고 폭력시위에 대한 압박으로 비폭력투쟁 중심의 노선이 채택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시탄이 그 이후로 자주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여 부시탄은 그렇게 전설로 남아버린 최루탄이 되었다. 그 때 이미 한국에서 수출한 최루탄이 그 지나친 독성으로 인해 외국에서 반품 받았던 시기기도 했었다.

사실 물대포의 시대에, 고무총의 시대에 최루탄을 떠올려 보며 드는 생각은, 영웅적 가투 협객들의 무용담이 아니다. 오히려 간간히 떠오르는 것은 그 시절 최루탄 발사와 투척규정을 어기면서, 안전핀을 뽑지 않고 불발 최루탄들을 발사했던 어느 가려린 청춘들의 잔상들이다.
얼마전 본 The lives of others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손씻은" 협객들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어쨌든 부시 방문 반대 투쟁을 벌였던 남미 곳곳의 시위대를 보면서 부시탄의 추억을 떠올리며 착찹해 지는 밤이다. 최루탄 없는 세상에 살게된 것은 행복한 일이나 우리는 어느덧 세상의 문제들에 함께 기침하고 눈물 흘리던 어떤 추억도 잃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올해가 6월 항쟁 20주년이라나?  

아래는 요즘 기준에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를 한국 환경운동의 전사에 대한 재밌는 기사다.
한국에서나 가능했을 환경운동의 역사랄까?
그렇게 보면 의대생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응급의료반도 있었고, 누군가가 연구해 낸 최루탄 냄새 중화법(마스크에 파스 붙이기, 랩으로 얼굴싸기, 치약바르기, 담배연기 불어주기, 물안경쓰기등등)도 있었는데 말이다.

한가지 적어둘 것은 아래 부산 민주화운동 기념관에 있다는 전시물인데, 무슨 큐레이터쉽인지 잘 이해가 안가지만서도, 화염병으로 전시된 칠성사이다와 맥주병은 좀 거슬린다. 부마 항쟁때 사용된 것은 아닐 테고, "사이다는 역시 칠성사이다"라는 상징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좀 리얼리티가 떨어진달까? 물론 그때는 NL 친구들이 "미제 똥물"이라며 커피 콜라 안마시기 운동하며 맥콜 마시던 조금은 코믹한 시대이기는 했다. 그러나 사이다병 맥주병은 잘 안깨지고 학교주변에서 대량으로 구하기도 힘든데다가, 실제 사용에 있어서 비싼 신나, 석유와 노동력 낭비가 상당한 조합인데 재현적 가치가 좀 떨어져 보인다. 농담처럼들 했던 말이지만, 일단 그런 병자체의 "그립감"도 , "비거리"도 않좋다.

내가 나름 "군사작전"에 준하던 수행력과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광주의 남총련 경험을 특화시키는 것일까?
화염병은 역시 보해 소주병이 최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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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환경운동25년](16)공청협② 학생운동권 ‘코어’ 세상 밖으로 [뉴스메이커 2006-05-19 10:42]
1987년 중반 반공해운동 진영은 ‘최루탄 공해’ 와의 사움에 주력했다.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데 항의하는 연세대생 시위에 최루탄이 자욱하다.

반공협 ‘언더’ 활동가들 민주화 바람 타고 ‘공청협’으로 커밍아웃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날쌔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잠시 한낮의 고요를 깼다가 곧 잦아들었다. 그가 사라지자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는 그가 들어간 화장실에서 대각선 쪽으로 끝에 있었다.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그곳에 혼자 있었다. 동중정(動中靜). 그는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근래에 없었다. 수많은 집회와 강연, 회의 등에 참석하다 보니 어디 사무실에 앉아 있을 틈이 있었던가.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두 다리를 책상에 걸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번에는 정중동(靜中動). 눈을 감고 오수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머리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때는 19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열린 제2의 ‘서울의 봄’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시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가 나간 자리에 안병옥을 앉힌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안병옥은 침착하고 끈질긴 면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 환경운동을 꾸준히 하기에는 딱 맞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더십과 조직력도 갖추고 있었다. 학생운동 그룹인 반공해운동협의회(이하 반공협)의 주축이고 구성원의 신망도 받고 있었다.

공문연과 반공협의 ‘동상이몽’

실제로 안병옥의 가세로 공문연은 활기를 되찾았다. 무엇보다 반공협을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반공협은 일정한 사무실도 없이 신림동 자취방, 대방동 차고 등을 전전하다 공문연이 있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연건빌딩 5층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냈다. 바로 공문연 사무실과 같은 건물의 같은 층 대각선 끝이다. 안병옥이 공문연에 출근한 직후의 일이었다.

뒷날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가 되는 반공협이 공문연 코앞에다 사무실을 낸 데는 나름대로 의도가 있었다.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최열과 공문연을 업기 위한 것이었다. 운동권 전문용어로 말하면 ‘공개공간 활용’이다. 반공협의 핵심인자인 안병옥의 공문연 ‘파견 근무’의 효과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친정이 가까이 있으면 시집 살림을 빼돌리기도 한결 쉽지 않은가.

반공협의 공문연 접수(?) 작전은 최열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보는 입장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최열에게는 안병옥이 끌고온 반공협이 천군만마였다. 그동안 반공협 회원들이 공문연 자원활동가 역할을 해왔지만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 공간에 들어왔다. 그것도 제 발로…. 거꾸로 공문연이 반공협을 공짜로 ‘접수’한 것 아닌가.

반공협은 1980년대 대학가를 지배한 학생운동의 한 지류였다. 이공대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해’라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주류 학생운동권과 비슷했다. 반정부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주류와 같이 호흡하려면 공해문제가 아니더라도 운동권이 관심을 갖는 온갖 시국사건에 참여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1987년은 대형 시국 현안이 연쇄 폭발한 시기이다. 반공협은 본업보다 이런 집회·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우선 운동권 내에 반공해운동의 존재를 알리고, 위치를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효과였다. 일종의 현장실습이자 전투훈련이다. 그래서 시위 때면 ‘반공해운동협의회’의 이름을 건 플래카드를 들고 일부러 맨 앞자리에 서곤 했다.

충분히 의식화되지도, 단련되지도 않은 인자들로 구성된 반공협 회원들의 이런 활동이 뒷날 본격적인 반공해 투쟁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워낙 인자가 부족하다 보니 집회·시위에 참여할 때 회원의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여자친구, 심지어 애인까지 동원해야 했다.

1980년 5월 이후 첫 대규모 격렬 시위였던 1986년 5·3인천사태 때의 일이다. 반공협에서 나간 시위대 중에는 회원의 친구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여학생은 운동권 정서에 둔감했다. 데모하러 나오면서도 옷맵시에 신경을 더 썼고,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들뜬 모습이었다. 반공협의 온산병 실태조사 때는 샤워시설이 없는 민박집에서 묵으면서 온갖 법석을 떨어 기어이 혼자 샤워를 한 일도 있었다.

그 여학생은 그날도 치마를 ‘빼입고’ 나왔다. 게다가 우유와 떡볶이까지 준비했다. 물론 반공협은 의도적으로 맨 앞자리로 갔다. 집회 때 선두에 위치하면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식순에 따라야 했다. 몇 차례 그런 과정을 거쳐 지휘부의 착석 지시가 떨어졌다. 마침내 떡볶이를 나눠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이런 데서 먹는 떡볶이는 정말이지 꿀맛이다.

군중을 해산하는 경찰 입장에서는 이때가 기회다. 경험자는 이런 때를 경계한다. 이를 알 리 없는 그 여학생이 방심하는 사이 최루탄이 발사되면서 경찰의 작전이 개시됐다. 운도 나빴다. 최루탄 하나가 바로 그 여학생 머리 위에서 터졌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최루탄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말았으니….

‘아니, 이 냄새는?’

반쯤 누운 자세로 상념에 빠져 있던 최열은 코를 시큰거렸다. 도심의 한낮은 평온한데 웬 최루탄 냄새인가. 잠시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오늘은 큰 시위가 없는 날이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잠시 스쳤다.

이 무렵 공문연 사무실의 대각선 쪽 화장실 안에는 안병옥이 눈물·콧물·땀방울을 펑펑 쏟아내며 뭔가와 열심히 씨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사과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 불발탄 하나를 가져와 해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열이 맡은 최루탄 냄새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6월항쟁 당시 사용된 최루탄. 왼쪽이 직격탄이고 오른족이 사과탄이다(부산민주항쟁기념관 전시품).

개헌정국발 최루탄 위해성 논란

1987년 전반기 정국은 ‘최루탄 정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고 정치 이슈가 민주화라면 국민 생활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이슈는 최루탄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클라이맥스인 6·26평화대행진의 또 다른 이름이 ‘최루탄추방대회’였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최루탄’하면 최열이 빠질 수 없다. 바로 공해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최루탄 공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선 때는 5·3인천사태 직후부터였다. 집회장에 갔다가 최루탄을 원 없이 마신 그는 외부강연 아이템으로 최루탄 공해 문제를 추가했다. 특히 여자대학 강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최근에 생리가 안 나오는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다들 눈만 멀뚱거린다. 손을 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다. 최열은 최루탄의 성분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최루탄에 많이 함유돼 있는 것이 브롬(Br)이다. 브롬이라는 물질은 여성의 생식기능을 마비·저하시키고 생리불순, 생리정지현상 어쩌고저쩌고….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최루탄을 많이 마시면 불임이 된다”는 얘기는 여학생들에게 큰 충격이다. 한참 최루탄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한 뒤에 그가 다시 말한다.

“부끄러워 말고 생리가 안 나오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세요.”

약간의 술렁거림…. 한 학생이 용기를 내서 손을 든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손을 들고 마침내는 우르르 한꺼번에 따라 한다. “어디를 가나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는 게 최열의 최근 회고다.

1987년 직선제 개헌정국에서 일반적인 공해문제는 약발이 먹힐 리 없다. 자칫 한가한 얘기가 돼버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루탄은 공문연을 비롯한 반공해운동 진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 1987년 5월 22일 오후 5시 인천 주안5동성당 사제실에서 열린 공문연 정기이사회 회의록을 잠시 들여다보면….

“최루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슈화해야 합니다.”(이길재 이사)

“최루탄은 전쟁 화학무기니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찰을 향해 국민이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최루탄 성분을 분석해봅시다.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 하고, 농약의 독성과 대비하고, 최루탄 공장이 어디에 있으며 생산량과 소비량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봅시다.”(성내운 이사)

“소책자 작업을 추진하고 슬라이드를 잘 만들어서 널리 확산시킵시다. 임인덕 신부님께서 최열·임진택 선생과 상의해서 비디오·슬라이드를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정호경 이사장)

최루탄 문제와 관련한 공문연의 전략은 이를 ‘공해문제’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론이 성분 분석과 소책자 제작·배포 작업이었다. 안병옥이 불발탄을 갖고 화장실에 들어간 것은 성분 분석에 쓸 최루탄 분말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최열은 안병옥에게 이 일을 맡겼고, 안병옥은 반공협 회원들과 함께 최루탄 분말 채취 작전을 실행했다. 다음은 안병옥의 최근 회고.

“외국 문헌에 최루탄이 인체에 해롭다는 보도가 있어서 우리가 성분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누군가가 불발탄을 주워왔는데 사과탄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핀을 돌리고 뚜껑을 열면 분말이 나온다고 해서 내가 했다. 들어갈 때 굉장히 긴장했는데 별 탈 없이 분말을 채취했다. 그런데 최루탄 냄새가 건물 안에 퍼져 각 사무실에서 난리가 났다. 그 때문에 최열 대표가 건물주한테 꽤 시달린 기억이 난다.”

안병옥 등 반공협 회원들이 제작한 ‘피눈물 흘리는 민주주의’.

채취한 분말은 고무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 그 속에 넣어 밀봉했다. 그것을 다시 속을 파낸 백과사전 안에 감췄다. 이렇게 위장해 미국의 연구기관에 보낸다는 게 공문연의 계획이었다. 당시 국내에 사용된 최루탄의 종류는 KM25(일명 사과탄), SY44(일명 직격탄), 다연발탄(일명 지랄탄), 페퍼포그 등 네 가지였다. 이들은 최루성이 강한 CS탄 계열로서 염소·브롬화합물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었으나 다른 첨가물의 성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 알 수 없었다.

공문연의 생각은 국내에서 사용되는 최루탄이 시위해산용이 아니라 군사용 또는 폭동진압용이라는 것이었다. 성분 분석을 통해 이를 입증, 국민에게 널리 알린다는 게 공문연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이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최열의 기억을 더듬으면….

“미국 MIT가 유명해 그쪽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다. 얼마 후 결과가 나왔는데 매우 실망스러웠다. 우리가 다 아는 성분만 나온 것이다. 그쪽으로 보낸 게 실수였다. 최루탄의 원료는 삼영화학이 미국에서 주로 수입했다. 자기 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화학물질을 우리에게 얘기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긴 했어도 공문연의 ‘최루탄 싸움’은 대성공을 거둔다. 성분 분석 결과는 써먹지 못하지만 안병옥이 주도해서 만든 소책자가 대박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당시 길거리 베스트셀러가 된 ‘피눈물 흘리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최루탄! 그 죽음의 옷을 벗긴다’라는 자극적인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가격은 500원이었고, “3만부가 팔렸다”는 게 최열의 최근 회고다.

시위 현장에서 뜬 베스트셀러

최루탄의 역사, 부작용, 많이 사용하는 나라, 소비량과 민중탄압의 함수관계, 이한열 등 최루탄 희생자, 최루탄 재벌 등 딱딱한 내용을 담은 이 책자가 히트를 한 데는 그 이유가 있을 법하다. 사진, 그림, 만화, 퍼즐 등 젊은 감각에 맞는 아기자기한 팁들을 포함한 것이 그중 하나일 듯하다. 항의전화를 할 수 있도록 최루탄 제작회사와 남용 책임이 있는 관공서의 전화번호를 넣고 최루탄 예방제를 소개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도 엿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이 소책자의 발행처가 공문연 단독이 아니라 공청협과 공동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발행 시기가 1987년 7월 쯤이니까 공청협이 공식 출범하기 약 3개월 전이다. 그동안 반공협이 한 일을 대외적으로는 공문연 이름으로 내보낸 사실을 감안하면 이 책자가 반공협의 첫 공식 작품인 셈이다. 그것도 공청협이라는 이름으로….

공청협은 1984년부터 활동해온 반공협이 1987년 ‘오픈’한 조직이라고 보면 된다. 비공개단체가 공개단체화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공협=공청협이라는 얘기다.

환경운동사에서 공청협이 중요한 까닭은 이 조직이 공문연의 최열을 업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더 나아가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공해연구회의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 등도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주었다. 즉 지금의 환경운동권의 가장 강력한 뿌리 조직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1987년 10월 10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공청협의 주축은 안병옥을 비롯해 윤제용(현 서울대 교수)·김근배(현 전북대 교수)·박상철(현 한영회계법인 공인회계사, 환경운동연합 감사)·이성실(자연그림책 작가, 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저소생물분과 실행위원) 등 반공협 시절부터 활동한 그룹이다. 여기에 새로 가세한 주요 인물이 황상규(현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전문위원)와 최예용(현 시민환경연구소 기획실장)이다.

황상규의 공청협 참여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과학기술운동이나 그 지류인 반공해운동 멤버가 아니라 학생운동권 주류에 있던 스타급 인물이기 때문이다. 부산 성도고 출신으로 서울대 공대 공업화학과(지금의 응용생물과학부) 83학번인 그는 비공개·공개 파트 활동을 두루 거쳤고 학내 사건으로 실형까지 사는 등 전력이 화려했다.

1~2학년 시절 언더에 있던 그가 오픈 공간으로 나온 것은 학생운동 전반이 학생회를 중심으로 공개활동을 지향하기로 한 1985년이었다. 그는 자연대의 김세진(1986년 분신 사망)과 사회대의 이재호(1986년 분신 사망) 등과 함께 단과대 학생회 준비 작업을 벌였고, 자신은 공대를 맡았다.

1986년 신학기에 공대 학생회 구성하면서 그는 경쟁자인 장유식(현 변호사)과 역할 분담을 약속했다. 선거에 지는 사람이 총무부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장유식이 당선되자 그는 약속대로 총무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구속되고 김세진·이재호가 ‘열사’로 산화하는 격동의 국면은 바로 그 직후에 펼쳐진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파워맨’ 황상규의 진로 결정

“자민투·민민투가 나오고 개헌문제까지 얽혀 복잡한 정국이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자민투 계열의 반전·반핵, 팀스피리트 반대가 이슈로 부각할 때 내가 공개 파트를 맡았다. 3월 하순에 구속된 것이 그 때문이다. 정권의 대응 수위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더니 국가보안법으로 걸었다. 정권이 초강경 대응으로 나오자 다들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하고는….”

그가 구속된 지 약 한 달 뒤에 벌어진 사건은 엄청났다. 4월 28일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은 그로서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이상이었다. 그 자신이 두 친구가 몸을 불사르며 외친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의 메신저였기 했기 때문이다.

자민투·민민투는 1986년 봄 서울대를 중심으로 분화된 학생운동권의 분파다. 자민투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의 약자로서 반제민족민주혁명을 위해 반미·반제를 우선적 투쟁과제로 삼고 있었다. 민민투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의 약자로 파쇼타도를 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민투는 NL(민족해방), 민민투는 PD(민중민주) 계열이라고 보면 된다.

공청협을 이런 주류 학생운동권의 잣대로 잰다면 NL보다 PD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해문제는 독점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 반공해운동권의 일반적 시각이었던 만큼 반미자주화 계열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황상규가 공청협에 참여한 것은 소신을 바꾼 것이 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안병옥의 얘기를 들어보면….

“김세진·이재호는 반미자주화운동의 선상에서 분신했다. 이런 노선과 반공해운동의 그것은 달랐지만 한 가지 접점이 있었다. 바로 반전·반핵이다. (반미자주화 노선과 반공해운동이) 서로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이 부분에서 일치했던 것이다.”

1년 반 남짓 복역하고 1987년 7월 출소한 황상규는 고민 끝에 반전·반핵·평화·공해운동으로 자신의 진로를 잡았다. 사실 그는 반공협이 낯선 곳이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공해의 정치경제학’(츠르 시게토, 풀빛, 1983년)을 읽고 환경문제에 눈을 떴고, 2학년 때 반공협에 참여한 바 있었다. 3학년 때인 1985년에는 아예 휴학을 하고 온산 공해 현장으로 ‘이전’을 시도했고, 그해 말에는 수질환경기사 1급 자격증까지 땄다.

또 한 명의 ‘파워맨’이 등장하면서 반공협의 오픈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 무렵 반공해운동도 최루탄 정국의 긴 터널을 벗어나 대선정국으로 급전하게 되는데….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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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반미자주화 계열의 대학가 시위. PD계열에 가까운 반공해운동권이 NL계열의 반미자주화 노선과 맞닿는 지점이 반전·반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