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ck-eR/Resources 2007. 8. 24. 15:33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인터넷에서 그리고 신문에서 속칭 "개념글"을 찾기란 쉽지가 않은데, 간만에 읽을만한 글이다.
누가 썼나 했더니, 유학 오기 전에 꾸역꾸역 읽었던 "근대의 책읽기"를 쓴 천정환이다.
이젠 교수가 됐구만. 축하할 일이다.

사실 근대의 책읽기는 자료의 압박이 상당해서 정작 근대의 책읽기가 어떻다는 말이냐를 그다지 강렬히 남기지는 못했었는데 학위 논문이었으니까 이해도 된다. "성실성"과 "가능성 (잠재력)"은 비슷한 종류인 것 같아도 다른 것이어서, 둘을 함께 요구하는 경우엔 대개 가능성(잠재력)은 성실성으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거나 표현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인간시대" "성공시대" 스토리가 지식인의 것은 아닌데도 대개 그렇게 밖에 한국에서는 안그려지는 것이고, 어찌 보면 그 연장선상에 "디워"도 있는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개념글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향한 생산"이 어떤 생산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여전히 "모범생"의 어떤 자리로 회귀하는 데, "대중의 생산"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 어차피 매니아에서 생산의 힘이 나오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에 대중생산의 기저를 맡겨두고, 지식인의 한계를 논하는게 논리적 모순 아닌가? "OO지역 교수 OO명 이명박 지지선언!" "박근혜 캠프의 OOO교수"들이 가능한 세상에서 어째서 "디빠" 교수는 안나오는가?
사실 대중은 이미 그 논리를 알고, 시비걸고 있는 것 아닐까? 
디워가 깐느 작품상  후보가 될거라고 기대하는  관객들 봤는가? 
대체 오늘날 지식인은 누구인가? "신지식인 심형래?" "문화 게릴라류의 진중권?" 아니면 천정환 자신?

무엇보다 "대중"으로 파악하는 이상 "카오스모스" 같은 문제설정 밖에는 할 수 없어지고,
그것을 향한 생산도 "공장제 기계공업"에 대한 "공장제 수공업"적 도전이거나, 포드주의에대한 포스트포디즘적 발상 전환을 쫒아가는 것 밖에 있겠는가? "생산"은 이미 초국적이고 지구적 상황에 놓여있는데.

그리고 대개 "문학"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언급하는 논지들은 "문학연구"를 결정적이고 본원적 기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기술자들의 "셀프 프로모션"이 지식의 장을 천박한 상업논리에 내주게 된 것 아닌가? "문화"-"문학"-"문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없어진 것이, 지식인들이 실상은 자기 생산엔 별로 관심 없고, 이행과 전환만 쫒아다닌 결과는 아닐까?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현대의 대중과 지식인 : ‘디워’ 논란

문화 연구는 대중문화가 모든 사회적 힘이 관여된 전장이며 늘 새로운 터라는 데 착안하고 있다. 영화 ‘디워’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테크놀로지의 문제, ‘괴수 영화’라는 장르와 수용의 행태, 그리고 배경에 있는 미국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은 ‘디워’ 수용과 논란에 개재된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거기에 바로 거대한 카오스모스로 존재하는 한국의 ‘대중’이 있다.

‘디워’ 논란은 아직 우리가 ‘대중’이라는 현상과 그 카오스모스를 잘 읽어내거나,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지식인’의 비평이 오히려 문화지체와 지적 한계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들끓는 대중 현상이야말로 ‘지식인의 죽음’을 확증해주는 듯하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몇 가지 해석의 도구 때문에 대중보다 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텍스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현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도구란 대중이 처한 현실 자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디워’ 논란만 보아도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중의 앎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단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강한 도전 의식과 소외된 자로서의 분노, 그리고 무차별한 향유의 정신과 상식적 윤리성, 또한 마니아적 집요함과 여러 분야의 지식을 나눠 가진 모순적 존재이다. 평소에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데서 서식하지만, 때론 한데 뭉쳐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방향과 반응도 진화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몇 줄짜리 ‘댓글’이 곧 대중은 아니다.

양심적이고 날카로운 한 문화평론가가 ‘디워’ 때문에 마치 공적처럼 돼버린 사태는 대중의 모순적 역동을 그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는 쉽게 사태를 애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추상’에 환원하고 대중을 ‘초딩’에 비유했다. 그는 전혀 공적도 아니고, 그의 ‘디워’ 평가도 옳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는 복잡다단한 현상으로서의 대중을 단순히 사상하며, 윤리적·문화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의식을 건드린 듯하다. 물론 대중의 파도 속에는 참주선동을 일삼는 음험한 세력이 언제나 끼어있을 수는 있다.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주체-수용자 현상을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 문화의 정치 경제학적 재생산과 개별 텍스트에 대한 분석·비판은 그를 위한 중요한 통로이다.

◆한국에서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

하지만 문화연구가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미술·문학·영화 같은 개별 장르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문화연구는 수용주체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와 돈,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깊게 문제 삼는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주지하듯 후기산업사회의 계급대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영국에서 탄생한 ‘시각’이다. 이는 대중과 엘리트,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는 효과를 지닌 입장들을 지칭했다. 그래서 문화연구는 하위 주체와 그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젠더 연구와 탈식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화 연구는 문학 연구의 밭으로부터 움이 터서 일구어지고 있다. 문학이 전 시대의 중심적인 양식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총체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예민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풍속·일상·문화제도·수용자·젠더 등에 대한 논의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구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화사나 문화 연구의 방법론을 참조해서 많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외에도 계급·젠더·민족(인종) 문제에 민감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그리고 전통적인 미학이 다 문화 연구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 연구는 인문-사회과학 내부의 ‘통섭’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편, 현실과 연구 및 현실과 비평의 연결 강도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현대 한국의 문화사가 제대로 서술된 적이 없고, 문화 재생산의 한국적 양상이 총체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문화과학’ 등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개 약진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와 담론이 어떻게 공통의 의제와 담론의 장을 만들 것인지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영미의 문화 연구가 가진 한계는 이미 지젝이나 스피박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문화 연구는 현실과의 연관이 미미해진 이론과 문학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본성상 대학 학과의 틀 속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라는 문제 의식 자체 속에 앎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연구도 서구 문화 연구 이론의 영향을 물론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끝없이 역동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문화 현실이 더 1차적이며 근본적인 문제틀이다. 오늘날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발걸음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는 소위 ‘선진국’의 이론에도 한 발, 또 현실에도 여러 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긴장력은 무조건 중요하다. 문화적 현실은 ‘지식인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문화 연구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의 영역을 지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앎을 종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적인 계몽이 불가능하고, 대신에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길임을 문화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화의 변화와 과제

어떻게 한국의 문화 연구는 공동의 주제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비판적 문화 연구는 계급과 성,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토픽을 다루지만, 그것은 ‘지금-여기’의 문화변혁의 의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2002년의 승리는 문화적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중성의 성격 변화와 한국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대중의 외부’도 없고 대중문화의 외부도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즉 삶의 양식) 전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그 활동과 소통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영역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성 변화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측면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서 돈은 얼마나 더 중요해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시끌벅적한 대중문화의 장이야말로 오히려 돈만으로 다 안 되는, 내지는 돈의 장악이 지닌 모순이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에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8대 2, 아니 9대 1 사회로 영구히 공고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불평등과 계급불평등은 이제 단단히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적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로 파급되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면적으로 문화적 양극화는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빈곤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로 문화의 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문화는 정치 문제이다.

그런데 문화의 양극화는 ‘반-경향’과 함께 관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상품만이 시장을 장악하여 대량의 이윤으로 회수되는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심각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추구는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성을 통해 구현되는 공통의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다른 한편 취향에 의해 수평적으로 준별되는 문화의 향유에로 달려가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

마니아(동호인·문화 부족) 현상은 일단 소요 자본과 진입장벽이 크지 않은 분야에서만 두드러지지만, 문화적 취향을 근대적인 ‘고급/저급’ ‘본격/통속’과 같이 위계지어진 것으로 구분하거나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특정 경제적 계급에 귀속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계급 구성과 정치·경제적 계급 구성 사이의 불일치, 또 노동과 향유 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항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의 괴리가 점점 더 복잡하고 커지는 양상을 띤다.

마니아는 대중의 존재성을 바꾸고 또한 강화한다. 그들은 지적 엘리트나 지배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앎을 개척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횡적 연대는 그 자체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참여군중(Smart Mobs)’ ‘대중지성’ 등이 운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제품(자동차, 패션, 각종 전자기기 등)과 특정한 대중문화 상품(TV드라마, 연예인, 영화 등)에 대한 동호인 문화는 이제 일상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소비제품과 대중문화 수용에 있어 마니아들의 도움을 얻고, 또한 스스로 마니아가 되어 비평하고 옹호한다.

거대한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선도하는 힘이 전위나 지식인이 아니라, 열정을 바치는 마니아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전통적 비평의 불가능함도 여기와 연관된다. 문화 연구도 생산되는 텍스트를 뒤따라 다니면서 주석 달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생산하는 앎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문화 연구가 ‘대중을 향한 생산’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 그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외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활용하고 필요한 만큼 긍정하고, 대중 현상에 배후에 숨어서 권력과 지배를 항구적으로 누리려는 세력에 저항하고, 대중의 역능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연대의 전선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앎의 연대 전선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순종과 발전주의의 나락에 빠진 대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과업과 관계 깊다.

〈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경향신문   2007-08-24 1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