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맑스주의 경제학자 임용을 둘러 싼 논쟁과 "자본론"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는가 보다.
작년부터 김수행 교수가 은퇴하면 서울대 경제학과에 맑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새로 임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터져나오더니, 이젠 기정 사실화 되어가는 것 같다. 학부를 담당하는 과장도 대표적 발전론자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자 이영훈 교수라니 그나마 "배려"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듯 하고...
학내 사정이야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인데다가,
퇴임하는 교수의 관심사와 영역을 "땜방"하는 교수 임용이라는 것도 대단히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논리이기에 해당 과의 판단과 결정에 따를 일이겠지만, 오마이뉴스에 올라 오는 여러기사들을 보면서 착찹한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족 하나, 한국식 대학교수 "정년퇴임제"도 문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불난데 부채질 하는 격이지만, 나는 김수행의 비봉출판사 자본론 번역 판본을 지극히 혐오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강금실의 전 남편이 경영했다는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자본론 번역이 그나마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인데, 최소한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프트커버"라는 점에서 만도 그러하다. 빚만 남기고 출판사가 망해 강변호사가 그 빚을 떠 안았다니 이론과 출판사의 자본론은 그 자체로 참으로 기구한 역사를 남긴 셈이다. 물론 백의 출판사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판 자본론은 안타깝게도 "주체사상"의 빛에 가려 큰 관심조차 없었으니 논외로 하고. 

다시 김수행 역 자본론의 문제로 돌아가면, 내 혐오는 그가 번역판권으로 새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는 가쉽 같은데 있기 보다는, 가장 민중의 삶 속에 가깝고 노동자의 관점에 가까워야할 맑스주의 경제학의 "정전"을 숱한 한자 사용 번역으로,  무지랭이 비한자세대 노동자들로 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십오년쯤 전에 사회과학 서점에 꽂혀있는 김수행의 자본론을 보고 "화폐론"이라고 읽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 열사의 한이 서린 "근로기준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본론이 되어버린 셈인데, 그런 "대학교재"다운 번역이 아니었으면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시절 맑스의 주저를 번역하는게 가능하기야 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맑스주의 경제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고, 우리가 이미 목도한 바 역사적 시행착오의 역사였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10쇄 이상 찍어내는 그 세월의 한자리에서는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언어와 친절한 번역정도는 해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 그렇게 저렇게 겉돌던 맑스주의 경제학"사"가 한명의 교수가 퇴직하니 마치 맑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대학내에서 끊기고 말게될 것이란 "불안감"을 생산하고 만 것 아니겠는가?

언젠가 노무현은 자신의 무기력한 청와대 권력을 한탄하면서, 열명의 경제자문위원을 만나면, 그중 한명의 진보적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힘들다고 말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다수"의 의견을 쫒지 않을 수 없다는 핑계섞인 논리로 자신의 친 시장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민주주의적 이성"을 보여준 셈인데, 그의 정치적 무지와 무능력은 차지하고라도, 이땅의 맑스주의 경제학자라면 적어도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단지 신자유주의 경제상황하에 놓인 "시대"를 한탄하면서, 대학과 대중의 탈/반맑스주의적 경향을 "학적 다양성"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학적 구걸"행위 밖에 더 되겠는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가 공부하고 하고 있는 대학의 신문에, 공화당 대학생 위원회의 한 학생이 왜 "역사학과"에는 "보수학자"가 없는가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이 있었다. 사건은 옥스퍼드, 하버드에서 수학하고 상당수의 저작까지 가지고 있는 한 학자가 역사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것으로 부터 발단이 되었는데, 문제를 제기 한 학생은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인 역사학을 배울 "학습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학교자체가 갈수록 "진보적"이고 "맑스주의적"인 학풍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했었다. 요약하자면 "대학을 진보적 학자들이 장악했다"는 "폭로"가 그 글의 내용이었다.
이 사건이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자 "제국"인 미국의 한 사립대학의 일이라면 아마도 많은 한국사람들은 믿기 어려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학생의 "학습권 보장" "다양성 확보"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과에서는 자신들의 결정은 "학적 양심"에 따른 것이라는 짤막한 논평을 내놓았고, 대다수의 학생들도 대체로 이 상황을 문제 삼지 않았다.
거친 비교가 되겠지만, 이 상황과 한국의 작금의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학문의 역사, 혹은 학적 계보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다. 그것은 단지 시류를 한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사회와 투쟁하는 하나의 실천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실천은 "공부하는 자" "가르치는 자"등 학문의 생산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의 일차적인 소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맑스주의 경제학자 없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우려하는 여러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써는 지극히 정당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순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학적 실천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의 우려와 한탄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맑스주의 경제학이 "불필요한 학"의 범주로 치부되고 말았는가?
과연 맑스주의 경제학은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대학과 대학밖 사람들에게 제시 할 수 있을 것일까?

대학의 교수 자리 하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순간 맑스주의자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그와 같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펀드매니저"와 "컨설턴트"의 꿈만이 경제학의 최고봉에 걸려있을 때,
맑스주의 경제학은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파리의 연인"같은 드라마에서 성공한 CEO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자본론"을 꼽았던 것 처럼, 하나의 패션이자 악세사리 정도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일까?

그나마 정운영선생과 같은 논객도 사라진 이 시대에,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지 대학의 맑시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